‘사라’ 대신 ‘팔아라’… 고객은 왕호감 업계선 비호감
파격적 행보로 불황 탈출에 나서고 있는 주진형 한화증권 사장에 대한 그룹의 재신임 여부가 촉각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한화금융프라자 전경. 일요신문DB
국내 증권사들이 고객에게 보내는 기업분석 보고서에는 유독 찾아보기 힘든 단어가 하나 있다. 해당 기업의 주식을 팔도록 권하는 ‘매도’ 의견이 바로 그것인데, 매도를 권유할 경우 해당 기업뿐 아니라 고객사인 다른 기업들의 항의도 빗발치기 때문이다. 증권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증권사에서 나온 전체 보고서 2만 5709건 중 매도 의견을 낸 리포트는 단 두 건에 불과했을 정도로 매도는 금기어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주진형 사장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한 한화증권에서는 요즘 매도 의견이 심심찮게 나온다. 주 시장이 “증권업 불황은 고객신뢰를 잃어버린 탓”이라며 애널리스트들에게 매도 보고서를 내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주 사장은 ‘매수’ 일색인 보고서에서 ‘보유’와 ‘매도’ 의견 비중을 전체 분석대상의 40%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아침 회의를 직접 챙기며 매도 리포트 작성을 독려했다.
증권사 영업맨들에게는 금과옥조나 다름없는 주식거래 수수료 체계와 성과급도 손댔다. 주식거래 수수료는 고객이 주식을 사고팔 때 증권사에 내는 돈으로, 사고파는 횟수와 액수가 많을수록 수수료도 높아진다. 또 영업사원들은 고객들이 주식을 자주 거래해 수수료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성과급을 받는다. 이러다보니 영업사원들은 고객에게 자꾸 주식을 사고팔도록 부추기고, 고객들은 자연스럽게 장기보유 대신 단타매매를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주 사장은 ‘회전율-수익률 상관관계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전담 관리자가 있는 고객 수익률이 관리자가 없는 고객 수익률보다 오히려 2.8~6.0%포인트 낮다는 통계를 공개했다. 쉽게 말해 영업사원이 매매를 부추긴 고객의 수익률이 그냥 내버려둔 고객보다 못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거래할 때마다 붙는 수수료를 정액제로 바꿔버렸다. 하루 1번을 매매하건 1년에 한번 거래를 하건 같은 돈을 내도록 한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영업사원의 성과급까지 폐지했다.
최근에는 사실상 매매하지 말도록 권하는 ‘나쁜 주식’을 공개해 증권가에 또 한 번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 7월 ‘고객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고위험등급 주식’을 선정해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 ‘고위험등급 주식’은 결손금이 늘어나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상장사, 빚이 맞아 이자비용이 영업이익을 초과(이자보상배율 1배 미만)하는 기업, 영업손실을 내고 있는데도 주가가 과도하게 오른 회사를 말한다.
여기에 한화증권 리서치센터가 자체 분석을 통해 다른 주식보다 손실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고위험주에 넣기로 했다. 주 사장은 지난 9월 22일 80개 상장기업의 실명을 ‘고위험 주식’으로 분류해 공개했다. 한화증권은 이들 종목은 고위험 요건을 충족한 이후 6개월간 모두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평균 주가하락률은 19.5%라며 개인투자자들은 매매를 자제하라고 권유했다. 사실상 ‘투자 금지’라는 주홍글씨를 새긴 셈이다.
이처럼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는 주진형 사장이지만 승승장구만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업계에서 ‘이단아’로 낙인찍힌 데다 내부반발이 거세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다른 증권사들도 주가가 과대평가돼 투자자 손실이 우려될 경우 매도 보고서를 내고 있고, 고위험 종목은 ‘알림 서비스’ 등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마치 한화증권만 고객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주식매매 수수료 체계 개편도 한 꺼풀 벗겨보면 결코 고객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이 상당하다. 고액 투자가들에게는 정액제 수수료가 유리하지만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단타매매를 하는 개인투자자들은 오히려 수수료 부담이 더 늘었다는 것이다.
증권사들의 사활이 걸린 수수료 문제를 놓고는 다른 회사 CEO(최고경영자)와 온라인에서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윤수영 우리자산운용 사장은 최근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2000년대 중반 키움증권 고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던 자료에서는 회전율과 수익률의 관계가 플러스 상관관계를 보였다. 초고빈도 거래자들은 주가지수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었다”며 “(한화증권의 주장이) 마치 하나의 상식처럼 굳어질까 염려된다. 현재 개인투자자 전체 거래의 90% 이상은 온라인 거래로 이뤄지고 있어 오프라인 회사의 분석이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한화증권의 생각은 잘못된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내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 우선 주 사장의 파격행보에서 선봉장 역할을 맡았던 리서치센터에서 반기를 들고 있다. 최근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에서는 15명의 인력이 빠져나갔다. 이 때문에 기업분석파트에서는 애널리스트가 1명만 남은 상태다. 게다가 인력이탈이 법인영업과 브로커리지 등 핵심부서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화증권은 빠져나간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수시채용을 실시하고 있지만 성과급 등이 없는 탓에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승연 회장 복귀를 앞둔 한화그룹이 최근 한화증권에 대한 대대적 경영진단에 착수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한화그룹의 이런 행보가 주 사장에 대한 재신임 성격이라는 해석마저 내놓고 있다. 전례없는 불황에 유례없는 파격으로 대응해온 주진형 사장이 위기의 증권사를 구해내는 영웅이 될지, 분란만 일으킨 이단아로 남게 될지 갈림길에 서있다.
이영복 언론인
주진형 사장은 1959년 생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존스홉킨스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세계은행 컨설턴트, AT커니 이사, 삼성증권 전략기획실장(상무)을 거쳐 우리금융지주 전략기획 담당(상무), 우리투자증권 리테일 사업본부장(전무) 등을 역임한 그는 대표적인 금융 전략기획 전문가로 통한다. 한화투자증권은 지난해 9월 12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임시주주총회 및 이사회를 열고 그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