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 장성익 씨(가명) 인터뷰
장성익 씨(가명).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1993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장 씨는 아직까지 얼굴은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술잔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면 함께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술을 따라주지 못하니까…”
장성익 씨(가명)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지만, 식당엔 정적이 흘렀다. 낡은 선풍기가 돌며 고개를 까딱 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래도 오늘은 꼭 한 잔 드리고 싶습니다.” 장 씨는 달라진 분위기를 의식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마주앉은 일행이 얼른 술잔을 들었다. 장 씨가 소주병을 기울기 직전, 가까스로 잔을 맞춰 댔다.
장 씨는 시력이 좋지 않다. 동행하는 사람이 없으면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야간은 물론 대낮에도 그렇다. 3개월 동인 수차례 만났지만 아직도 기자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한다. 악수를 하려면 장 씨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야한다.
장 씨는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이제는 시력 측정도 불가능하다. 그는 ‘시신경 위축’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 시각 신경섬유 일부가 위축되면서, 제대로 된 시각정보를 전달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진행 상태에 따라 시야각, 시력이 감퇴하고 심하면 실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재까지 렌즈나 안경을 통한 교정 또는 치료 등이 불가능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시점에 알았다. 선생님이 부모에게 “아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알리면서부터다. 시력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장 씨는 5학년이 되는 해, 학교를 그만뒀다.
# 살인자
1991년 11월, 장 씨는 살인자가 된다. 친구 최현철 씨(가명)와 함께 경찰서로 임의동행한 뒤, 공무원자격사칭, 강도살인, 강도강간, 강도상해, 특수강도, 특수감금 등 총 8가지 혐의를 받았다. 경찰은 친구 최 씨를 1991년 8월부터 11월까지 발생한 금품 갈취 및 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장 씨를 공범으로 구속했다.
1990년 발생한 ‘엄궁동 미제살인사건’에서도 공범이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다. 경찰은 장 씨에 대해 “친구 최 씨가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과정에서도 범행에 가담했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은 검찰을 거쳐 재판에도 반영됐다. 1심 재판부는 장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이렇게 판시했다.
“…피해자들을 감시하던 피고인 장성익은 피해 여성을 성폭행하기 위해 자리를 피해달라는 피고인 최현철의 요청에 따라, 결박한 피해 남성 A를 강물 속에 밀어 넣었다. A가 결박을 풀고 밖으로 기어 나오자 한동안 격투를 벌이다가…피고인들은 피해 여성을 쓰러트린 후 머리와 다리를 잡고 강물가로 끌고 내려와 돌밭에 내려놓고…피고인 장성익은 피해 여성을 살해하고 도주할 마음을 먹고 주먹크기만한 돌로 여성의 머리를 1회 강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
경찰이 작성한 수사 기록을 보면 범행 시간은 새벽 2시다. 범행 장소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강변도로였으며 가로등도, 달빛도 없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장 씨가 홀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 재판부는 장 씨가 심야시간 피해자들을 감시했고, 격투를 벌였으며, 돌로 머리를 겨냥해 내리쳤다고 판단했다.
최근 일요신문이 병무청으로부터 입수한 장 씨의 군 징병검사 기록. 장 씨는 두 번의 신체검사 끝에 시신경 위축 판결을 받고 군 입대가 면제 됐다.
# 사라진 사람들
유죄판결이 확정되고, 장 씨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21년이 흘렀다. 그동안 장 씨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감 이후 5년이 지난 때였다. 접견을 오면 늘 울고만 가던 아내에게 장 씨는 “좋은 사람 있으면 찾아보라”고 말했다. 억울함이 풀릴 수 있을지,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 젊고 예쁠 때 얼른 다른 사람을 찾아 가라는 뜻이었다. 이날 아내는 가장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장 씨는 말없이 철창 너머의 아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교도소에 서류 하나가 도착했다. 아내가 보낸 이혼서류였다. 장 씨는 교도관이 전달해준 서류를 끌어안았다. 봉투가 눈물로 젖어 찢어질 때까지 품 안에서 놓지 못했다.
2003년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들이 수감된 이후 10년간 홀로 보따리에 사건 기록을 짊어지고 전국각지를 돌며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던 어머니였다. 해가 지날수록 소식이 점차 끊기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고, 접견도 더 이상 없었다. 어머니가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장 씨는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 당당하게 살기 위해
3년 전 어느 날, 딸이 장을 보러가자고 했다. 출소 이후 먼저 말을 걸어 온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시장을 함께 걸으면서도 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집이 가까워질 무렵 딸은 장 씨를 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아빠에 대해서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해?” 장 씨는 잠시 머뭇거렸다.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사업하다가 잘못돼서 3년 정도 다녀왔다고 하자.” 딸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딸이 다시 장 씨를 불렀다. 결혼을 한다고 했다. 시댁에는 앞서 장 씨의 말 대로 이야기를 전했다고 했다.
1년 뒤, 손자가 태어났다. 장 씨는 처음 손자를 안았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장 씨가 구속될 때 딸은 갓 돌을 지난 아기였다. 출소 후엔 몰라볼 정도로 성인이 돼 있었으니, 손자 얼굴에 그때의 딸이 겹쳐 보였다고 했다. 동시에 어린 딸을 돌봐주지 못하고, 자라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죄책감과 미안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도 했다. 장 씨는 기자와 만나면 꼭 억울함을 풀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늘 “딸과 손자가 나 때문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문상현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