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 거절해 대회 못나가…“팀워크라는 이름으로 희생 강요당했다”
2월 26일 서울신문은 백철기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이번 올림픽 때 이승훈 선수의 금메달을 위해 정재원 선수가 희생했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같은 방식의 작전이 동원됐다”고 말했다. 이에 백 감독은 “모두 다 협력해서 하는 거다. 특정 선수 밀어주기란 없다. 작전상 선수들의 동의를 받았다 그 덕에 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맞받아쳤다.
백철기 감독의 해명이 거짓일 수 있다는 의혹이 나왔다. 2017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때에도 특정 선수 밀어주기 요청을 했었다는 현직 선수의 폭로가 나온 탓이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로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던 주형준 선수는 2월 25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관련 기사)에서 ”지난 삿포로 때에 백철기 감독이 ‘페이스메이커 해 볼 생각 없냐?’는 제의를 해 왔다. 혼란스러웠다. 난 내 실력대로 타고 싶었지만 제의를 거부하면 불이익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 ‘페이스메이커를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제가 밀어줬던 선수와 1, 2위를 다투는 상황이 왔을 때 ‘발 내밀기’를 해서는 안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백 감독의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3월 2일 MBC 아침발전소에 나온 박석민 옛 빙상 국가대표 선수
옛 국가대표 선수도 입을 열었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페이스메이커를 맡았던 박석민 선수는 2월 24일 일요신문과 만나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때 전명규 당시 대한빙상경기연맹(빙상연맹) 임원이자 한체대 교수가 나와 고태훈 선수에게 직접 ‘특정 선수가 4관왕을 하도록 돕고 체력을 비축하게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전명규 교수 지도 아래 있으면서 유일하게 전 교수의 직접 지시를 받았던 때가 이때였다”고 증언했다. (관련 기사)
매스스타트 국가대표를 지도자 추천으로 뽑는 빙상연맹의 선수선발규정이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수락한 선수만 뽑겠다는 의지라는 정황까지 나왔다. 빙상연맹 규정에 따르면 매스스타트의 경우 아시안게임은 3명이 출전하고 올림픽은 2명이 뛰는데 감독은 두 대회 각각 1명씩 추천으로 선수를 뽑을 수 있다.
주형준 선수는 “2017년 초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출전에 앞서 태릉선수촌 백철기 감독 방에서 백 감독의 페이스메이커 요청을 거절하며 ‘저는 그럼 뛸 수 없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백 감독은 ‘매스스타트 출전자격에 1명을 추천으로 둔 이유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다. 넌 뛸 수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매스스타트는 6400m를 달리는 경기다. 6400m와 가장 근접한 거리인 5000m 선발전 1, 2위인 이승훈, 김민석 선수가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매스스타트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추천된 1명은 이진영 선수였다. 주형준 선수는 국가대표 선발전 5000m에서 3위를 기록했던 선수였고 이진영 선수는 당시 5위를 기록했다.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 앞서 주형준 선수는 백철기 감독의 페이스메이커 요청을 거절했었다. 코치진은 주형준 선수보다 5000m 기록이 안 좋은 이진영 선수를 택했다.
이진영 선수는 한체대를 졸업한 뒤 강원도청에 소속돼 있다. 강원도청 감독은 한체대 출신으로 전명규 한체대 교수의 조교까지 했었던 김민섭 국가대표 코치다. 김민섭 코치는 일요신문이 ‘특정 선수 밀어주기’ 취재를 시작하며 옛 매스스타트 국가대표 박석민 선수를 접촉하자 은퇴하고 한체대를 떠난 박 선수에게 5년 만에 전화를 건 사람이다.
주형준 선수는 매스스타트 국가대표를 뽑는 기준 5000m에서 이진영 선수보다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매스스타트 대표로 뛰지 못했다. 실력보다 페이스메이커를 해 줄 수 있는 선수 위주로 국가대표팀을 꾸렸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스스타트가 양대 대회에서 개최된 건 이제까지 3회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2017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그리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다. 세계적으로는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월드컵 순으로 권위가 높지만 한국 동계스포츠계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양대 대회로 꼽는다. 메달 수상자에게 병역특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백철기 감독에게 “전명규 빙상연맹 부회장이자 한체대 교수가 뒤에서 국가대표팀 코치진에 지시를 내리고 코치들이 이를 그대로 따른다는 의혹이 있다”고 해명을 요구했다. 백 감독은 “내가 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지 2년이 됐다. 그런 일이 있다면 감독 자리를 안 하고 다른 데 갔을 것이다. 지도자들끼리 상의해서 결정한다.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는 않는다. 물론 의논은 할 수 있다”고 했다.
백철기 감독은 2017년 동계아시안게임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팀을 이끌었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는 윤의중 옛 감독이 대표팀 수장이었다. 2011년부터 7년 동안 양대 대회 매스스타트 경기 3번 모두 한국 선수가 맨 앞에 페이스메이커를 서고 마지막에 뒤에서 특정 선수가 스퍼트를 올리는 작전이 계속됐다. 단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7년간 3번의 경기에 유일하게 한자리를 지켰던 사람이 있다. 빙상협회 부회장인 전명규 한체대 교수다. 전명규 교수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뒤 성적 부진 및 파벌 논란 등을 이유로 사퇴했다가 3년 만인 2017년 2월 1일 빙상연맹 부회장으로 별다른 이유 없이 복귀했다.
지난해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명규 교수는 “사람들이 내가 빙상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다. 각 종목마다 따로 지도자가 있는데 왜 내가 영향력을 미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철기 감독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전 부회장 지시가 있냐는 질문에 “전 부회장이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박석민 선수의 증언에 따르면 2011년 동계아시안게임 매스스타트 경기에 앞서 전명규 교수는 박석민 당시 국가대표 선수에게 “너네가 잘해줘야 한다. 최대한 체력 비축하게 도와 줘라. 4관왕이 목표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대표팀은 윤의중 감독이 이끌고 있었다. 선수 선발과 구성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다.
주형준 선수가 한 가지 더 증언했다. 주형준 선수는 2017년 4월쯤 밀어주기 수혜 의혹을 받는 두 선수가 태릉선수촌에 들어오지 않고 한체대에서 개인연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도 개인훈련을 받고 싶어 전명규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 “나도 특정 선수처럼 한체대에서 개인훈련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주 선수에 따르면 당시 전 교수는 “그냥 태릉선수촌 들어가서 운동해라. 밥 데 용 코치도 섭외했으니까. 그 안에서 하라”고 했다. 전명규 교수는 일요신문이 “왜 특정 선수만 편애해서 개인 훈련을 제공하나. 특혜가 아니냐”고 묻자 “누구든 빙상연맹에 요청하면 집중 훈련을 받을 수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특정 선수를 도와주거나 훈련시킨 적은 전혀 없다”고 말했었다.
매스스타트는 2011년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었다. 전명규 교수는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뒤 “매스스타트 국가대표 선발 규정은 백철기 감독의 요청으로 바뀐 것”이라며 자신의 개입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철기 감독이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을 맡은 건 2년밖에 되지 않았다. 매스 스타트 국가대표 선발전이 사라진 건 백철기 감독이 부임하기 이전인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이후부터였다. 전 교수는 이에 대해 “그건 그 전 감독이 요청했다”고 대답했다. 백철기 감독 전에 대표팀을 맡았던 건 네덜란드 출신 감독 에릭 바우만이었다. 에릭 바우만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난 그런 요청 한 적 없다”고 밝혔다.
일요신문은 정재원 선수도 이런 상황에 놓인 적 있었는지 묻고 싶어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백철기 국가대표팀 감독 역시 아무런 해명을 내놓지 않고 전화 요청에도 답하지 않았다. 전명규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에릭 바우만 감독 자진 사퇴 이유 “전명규 오더가 내 훈련방식 가로막아” 이제껏 전명규 한체대 교수는 자신이 국가대표팀에 지시나 개입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전 교수의 이런 해명은 사실이 아니라는 증언이 나왔다. 더군다나 그는 빙상연맹을 떠나 있던 시기에도 국가대표 운영에 개입했다. 2월 27일 오전 4시 15분 네덜란드 출신 에릭 바우만 옛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감독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빙상연맹 운영진과 코치들은 네덜란드 철학이 담긴 내 훈련 프로그램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도록 방해했다. 일단 운영진이 태업(lots of sabotage)을 했다. 특정 훈련을 못하도록 하거나 내 훈련 뒤에 진행되는 한체대의 훈련이 뭔지 가르쳐 주지 않아 연계 프로그램을 짤 수 없도록 하는 등의 방식도 썼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이(and so on and so on) 내 훈련을 가로막았다. 책을 써도 모자란다”며 “빙상연맹 운영진은 이게 전명규 교수의 지시라고 내게 말했다. 코치들도 전 교수가 시켰다고 했다(What KSU people say it was ordered by big John. Same as what assistant coaches did and say)”고 폭로했다. 이어 그는 “난 최대한 선수들을 화합시켜 내 훈련 철학을 주입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한국 선수들은 더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다. 다만 난 꼭두각시가 되고 싶진 않았다(I don‘t want to be a puppet of a system that can be much better). 그래서 그만 뒀다”며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감독직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이유를 이제서야 밝혔다. 에릭 바우만은 2014년 7월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발탁됐다. 2016년 3월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돌연 사임했다. 에릭 바우만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재직하던 시기는 전명규 교수는 빙상연맹에서 떠나 있던 때였다. 빙상연맹을 떠나도 그의 영향력은 한체대 교수 직함으로도 충분했다. 2014년 초 소치 올림픽 직후 성적 부진과 안현수 귀화 사태 등을 이유로 빙상연맹 부회장 자리를 내려놨던 전명규 교수는 2017년 2월 복귀했다. 물론 선수가 지시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거부하기 쉽지 않은 건 전명규 교수의 막강한 영향력 탓이다. 에릭 바우만 옛 감독은 “그 당시 전명규 교수는 빙상연맹을 떠났을 때였는데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다 그의 권력 때문이고 모두가 그를 무서워한다(That Big John still had so much influences on that time. it is all because of power and that people are afraid of him)”고 했다. 그는 이어 최근 벌어진 페이스 메이커 논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제빙상연맹이 작전을 금하지만 경기에서 작전을 쓰긴 쓴다. 다만 네덜란드 선수단은 강요나 지시, 요구가 아니라 자진한 선수가 나올 때만 작전을 짠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매스 스타트에서 네덜란드 매스 스타트 팀 역시 페이스 메이커 작전을 짰다. 스벤 크라머 선수가 네덜란드 팀의 페이스 메이커였다. 스벤 크라머는 올림픽 3연패의 대업을 달성한 네덜란드 대표 스피드 스케이터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