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출신이지만 친기업 행보 보여...‘이재’에 밝은 성향이 되레 독 될 수도
8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인사하는 노영민 비서실장. 사진=연합뉴스
8일 문재인 정부 청와대 2기 참모진이 닻을 올렸다. 임종석 비서실장 후임에 노영민 대사가 임명됐고 정무수석에는 강기정 전 국회의원, 국민소통수석에는 윤도한 전 MBC 논설위원이 발탁됐다. 노 비서실장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시작한 청와대를 1기 비서진이 세팅을 잘해 안정화됐다”며 “어떤 주제든 정책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경청하겠다”고 했다.
노영민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하자 탈원전, 태양광 주도의 문재인 정권 기조가 계속 유지될 거라는 예상이 나온다. 노 비서실장은 ‘전기통(通)’으로 현재의 태양광 업계를 다져놓은 주역인 까닭이다. 그는 전기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1980년대 중반 다니던 연세대에서 제적된 노영민 비서실장은 전기기능기사·위험물취급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전기기술자가 됐다. 서울 성수동과 경기도 오산 등지 전기회사에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해 ‘전기노동자’로 활동했다. 1984년 청주로 내려온 그는 전기기술자노조를 만든 데 이어 1986년 그동안 익힌 전기기술을 바탕으로 금강전기 주식회사를 창업했다. 1995년 청주환경운동연합에서 이사직을 맡는 등 시민단체 활동을 펼치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위원장까지 올랐다.
2010년 6월 독도에 태양광발전소가 세워지며 태양광은 전국민적인 관심을 샀다. 이때 노영민 비서실장은 독도태양광발전건설추진위원회 고문으로 활약했다. 전기공사협회가 2008년 9월부터 3000여 명에게 모은 성금 30억 원이 설립 비용으로 쓰였다. 노 비서실장은 설립에 앞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민간 모금으로 건설될 독도 태양광발전소는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범국민적인 독도사랑을 승화하는 데 있어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범국민적 독도사랑 운동은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국가의 독도 기본계획에 실질적인 보탬이 된다”고 했다.
2011년 4월 충북 7개 시·군이 태양광 산업특구로 지정됐다. 사실상 노영민 비서실장의 작품이었다. 그는 보도자료를 내며 “국토해양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와 지식경제부 특구위원회가 충북도가 신청한 태양광산업특구를 심의의결했다”면서 “이 특구는 시·군 단위로 지정된 종전 143개 특구와 달리 7개 시·군을 한데 묶은 최초의 광역특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지역이 특구가 되면 우리나라 태양광산업의 중심으로 육성되고 옥외광고물 설치나 특허심사 등이 신속해지는 데다, 농어촌관광휴양사업 등도 수월해져 수도권 기업유치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정 규모와 자금력을 갖춘 시장형 공기업이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포함한 두 종류 이상의 전기사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은 노영민 비서실장이 국회의원 때부터 계속 발의하고 집중했던 법안이었다. 거대 자본의 태양광 사업 진출이 신재생에너지 저변 확대의 핵심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기사업법은 전기사업을 발전사업, 송전사업, 배전사업, 전기판매사업, 구역전기사업으로 구분해 동일한 업체나 개인에게 두 종류 이상의 전기사업을 펼치지 못하도록 한다.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용보급촉진법은 발전사업자에게 발전량의 일정량 이상을 신재생에너지로 만들라고 했지만 실제 이익을 보기가 어려워 잘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운동을 해오면서도 기업을 이끌었던 노영민 비서실장은 이와 같이 친기업 행보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의원 시절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적극 반대했고 국회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자며 ‘신성장산업포럼’을 이끌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이런 점을 부각하며 “국회에서 다년간 신성장산업포럼을 이끌며 만든 산업·경제계 등 각계 현장과의 풍부한 네트워크 및 소통 능력이 강점이며 민생경제 활력을 불어넣어 포용 국가의 기틀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비서실을 지휘할 최고 적임자”라고 노 비서실장을 소개했다. 충북 청주의 한 기업인은 “그는 기업의 민원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반도체와 에너지 분야에 매우 관심을 기울였다. 전기회사를 경영한 경험이 있고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이 예전 지역구였던 충북 청주에 위치했던 까닭이다. 이런 이력과 맞물려 삼성이나 LG 등 재계에도 노영민 비서실장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알려졌다.
노영민 비서실장의 청와대 진입을 두고 그가 보여준 ‘이재’가 되레 독이 될 수도 있는 의견이 나왔다. 그가 과거에 보여준 몇몇 행보에서 돈을 향한 그의 관심이 잘 드러나는 까닭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노 비서실장은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자신이 설립했던 회사의 주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시민단체가 이를 문제 삼기도 했다”며 “게다가 자신의 시집을 업무연관성이 있는 기업에 판매한 정황 등이 발견돼 홍역을 치렀다. 기업과 가깝고 이재에 밝은 게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잘 처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2004년 8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경제관련 상임위 7곳 소속 국회의원 157명을 대상으로 국회의원 본인과 배우자의 주식 보유 현황을 분석했다. 노영민 비서실장은 자신이 세운 회사인 금강전기 2만 6500주 등 2개 종목 주식 약 1억 6000만 원어치를 보유해 시빗거리가 됐다. 국회의원 가운데 경제 관련 상임위 위원은 기업과 관련된 각종 정보를 수시로 보고 받거나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정부는 공직자윤리법으로 국회의원의 보유 주식을 백지신탁하도록 한다.
카드 단말기 사건은 치명적이었다. 노영민 비서실장은 국회 산자위 위원장 시절 산자위 산하 공기업에 자신의 시집을 판매하려고 국회의원 사무실에 카드 단말기를 설치한 바 있었다. 대한석탄공사, 광물자원공사 등 일부 공기업은 노 의원의 시집을 대량 구매했다고 나타났다. 국회의원 사무실은 사업장이 아니어서 카드 단말기 설치가 불가능하다. 이 문제로 노영민 비서실장은 산자위 위원장직을 내려놨고 당원 자격정지 6개월 처분을 받았다. 사실상 총선 공천 배제였다. 그는 곧장 20대 총선 불출마 선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중책을 맡아 활동하며 재기를 노리던 그는 주중한국대사로 임명된 뒤 비서실장이 됐다.
1957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노영민 실장은 연세대 경영학과 76학번으로 입학해 학교를 다니던 중 긴급조치 9호 위반,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선출 거부 투쟁 등 연세대 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돼 복역했다가 1979년 광복절 때 형 집행정지로 자유의 몸이 됐다. 허나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수배되며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1990년 33세가 돼서야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장을 획득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