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2족 보행’ 원하는데 빠른 상용화 위해 ‘바퀴 달린 로봇’ 출시…결국 실패했지만 거침 없는 투자는 계속
페퍼. 사진=소프트뱅크
페퍼는 2014년 6월 소프트뱅크가 공개한 로봇이다. 마이크 4개와 HD 카메라 2개, 터치 스크린이 장착된 페퍼는 접객 업무나 교육 도구로 사용된다. 2018년 10월 영국 하원 교육특별위원회는 미들섹스대학 소유 페퍼를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주제는 인공지능, 로봇공학 및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내용이었다. 2017년 우리은행은 페퍼 3대를 도입했다. 현재 명동역 지점, 중화동 지점, 전산센터에 배치됐다. 상품 추천, 이벤트 소개, 창구 안내 정도를 담당한다고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휴대전화 매장, 은행, 소매점 등에서 사용된다.
나오(위)와 로미오(아래). 사진=소프트뱅크
페퍼가 휴머노이드‘형’ 로봇으로 평가절하되는 이유는 페퍼의 탄생과정에서 비롯된 손정의 회장과 로봇 개발자의 온도차 때문이다. 손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는 2012년 1억 달러를 들여 프랑스의 로봇개발업체 알데바란로보틱스(Aldebaran Robotics)의 지분 80%를 인수했다. 알데바란로보틱스의 영업을 담당했던 중국계 프랑스인의 설득에 손 회장의 지갑이 열렸다. 어릴 때부터 로봇에 관심이 지대했던 손 회장은 거침 없었다. 2015년 3월 알데바란로보틱스 CEO였던 브뤼노 매조니가 가진 지분 전량까지 모두 매수했다.
2족 보행 유지 여부와 상업적 가치 판단이 첫 번째 관문으로 등장했다. 애초 알데바란로보틱스가 인수되기 앞서 개발했던 58㎝ 상업용 로봇 나오(Nao)와 140㎝ 연구용 로봇 로미오(Romeo)의 크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2족 보행을 하고 실생활에서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해나갈 수 있는 기초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높은 가격과 협소한 로봇 관련 어플리케이션 개발자 시장이었다. 두 로봇은 구조적으로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특정 행동을 하게끔 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이 개발돼야 한다. 로봇 관련 어플리케이션 개발자는 세계적으로 그 수가 매우 적다. 로봇의 주요 고객층도 교육기관과 연구기관 정도에 그쳤다.
손정의 회장은 빠른 시일 안에 로봇을 실제 생활 속으로 진입시키고 싶었다. 가장 빠른 건 로봇의 두 다리를 없애는 일이었다. 손 회장은 다리 없는 로봇 페퍼를 내놨다. 바퀴로 움직이는 다리 하나의 로봇 페퍼였다. 그 뒤는 시장에 맡겼다. 페퍼가 성공해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으로 한정된 시장이 확대되면 개발자도 하나둘씩 늘어나는 ‘로봇 생태’가 자리 잡히리라 판단했다.
통신사를 가진 소프트뱅크는 휴대전화와 함께 결합상품으로 일본 안에서만 페퍼를 판매했다. 시장 진입 초반 “매진을 기록했다”고 홍보했지만 실상 팝업과 플래시 판매 등이 이끌었던 이른바 ‘신장개업발’이었다. 일본에서 방영된 광고를 보면 페퍼는 거의 완벽한 로봇이었다. 주인이 울면 위로하고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완벽한 반려로봇이었다. 실제로는 그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다. 시장은 실망했다.
페퍼는 사람 형태를 지닌 태블릿 PC에 불과했다. 게다가 활용 가능한 어플리케이션도 적어 시장은 팽창하지 않았다. 일본 개발자 특유의 정서도 한몫했다. 한 로봇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이 미국에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어플리케이션 때문이었다. 이는 미국 개발자의 습성도 뒷받침돼 이뤄진 성과였다. 미국 개발자는 ‘이게 날 위해 뭘 해줄까?’ 고민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허나 일본 개발자는 ‘로봇을 위해서 내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성향을 보인다. 로봇에 맞지 않는 개발 환경이 페퍼의 실패를 가속화했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B2C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B2B로 사업 방향을 돌렸다. 몇몇 일본 기업에 페퍼를 공급했다. 이는 단기 실적 챙기기에 불과했다. 일본은 기업끼리 연줄로 밀어주는 문화가 있어서 단기매출이 나온 뒤 지속적 성과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해외로도 눈을 돌렸지만 유통권을 두고 갈등이 생겨 미국 등지에서도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페퍼는 B2C와 B2B 시장에서도 자리잡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알데바란로보틱스 소속 유능한 개발자는 미국계 로봇 개발업체 보스턴다이나믹스로 떠나기 시작했다. 보스턴다이나믹스는 2족 보행 등 로봇 하드웨어 중심 회사다. 성과 때문이 아니었다. 손정의 회장의 방향과 알데바란로보틱스의 로봇 개발자의 목표가 너무 달랐던 까닭이다. 로봇 개발자의 기본적인 마음 가짐을 손 회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알데바란로보틱스의 내부를 잘 아는 관계자는 “로봇 개발자의 목표는 소프트웨어적으로 완벽한 로봇이 아니다. 일단 하드웨어적으로 완벽한 로봇을 만드는 게 로봇 개발자의 로망”이라며 “알데바란로보틱스에 소속됐던 유능한 개발자는 두 다리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빠른 상용화 때문에 다리를 포기하고 일단 팔 수 있는 로봇을 만들라고 하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손정희 회장은 2017년 보스턴다이나믹스까지 인수했다. 현재까지도 로봇의 미래에 거침없이 투자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손 회장은 한번 믿은 사람에게 계속 돈을 넣는 사람이다. 그랩, 위워크, 쿠팡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지금 로봇업계는 손 회장의 이런 투자가 어떤 결실을 낼지 궁금해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를 두고 손정의 회장 가까이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한 가지 조언을 남겼다.
“페퍼의 실패는 기정사실화됐다. 허나 손정의 회장의 로봇 사업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손 회장의 의도 자체가 선하기 때문이다. 손 회장은 젊은이가 없어진 마을에서 사라진 버스를 보며 반응하고 ‘연결’, ‘정’, ‘휴머니티’라는 단어에 꿈틀한다. 다만 로봇 개발자가 가진 꿈도 이해해야 한다. 자신만 꿈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같이 꿈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 로봇 개발자가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계속 개발자의 시장이 늘어난다면 성공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손 회장은 인간을 치유하는 로봇을 만들고 싶어 시작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