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비자는 ‘고객’ 한국 소비자는 ‘호갱’?
“GM 최고경영자(CEO)가 위증했다.”
지난 10일 미국 언론들은 시동키 불량을 10년간 숨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메리 바라 GM CEO가 의회 청문회에서 한 말이 위증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메리 회장은 GM 시동키 문제를 지난해 12월 말쯤에 알았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GM 시동키 꺼짐 현상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밥 힐리아드 변호사가 GM과 부품회사인 델파이 사이의 메일 내용을 법원의 허가를 받아 공개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소비자원의 ‘시동꺼짐 안전실태 조사’ 결과 쏘렌토R-싼타페-SM3 등 순으로 신고 건수가 많았다.
힐리아드 변호사가 공개한 메일 내용을 통해 지난 12월 18일에 GM이 델파이에 코발트 차량에 들어가는 시동키 관련 부품을 50만 개 긴급 주문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GM이 델파이에 부품을 최종 주문하기까지 내부 의사결정과정에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바라 회장이 시동키 문제를 알게 된 시간은 의회에서 증언한 것보다 한참 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GM이 결함을 알게 된 시점이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까닭은 미국에서는 자동차 회사가 결함을 안 지 5일 안에 리콜을 결정해야 한다는 법 때문이다. 따라서 바라 회장이 의회에서 답변한 말이 사실이 아닐 경우 위증죄와 함께 제조물책임법까지 문제가 될 수 있다. 힐리아드 변호사는 “GM이 5일 안에 리콜을 결정하지 않은 사이에도 시동키 문제로 1명이 죽고 20명이 다쳤다”며 GM을 압박하고 있다. 시동키 결함 은폐 소송에서도 검찰은 대규모의 연방·지방검사를 투입하며 GM과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에서 시동 꺼짐 현상으로 GM이 약 2000만 대의 리콜을 결정했고 연방 검찰이 강도 높은 조사를 하는 것은 시동 꺼짐 현상이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시동이 꺼지면 파워 핸들, 파워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다. 시동이 꺼진 차량의 운전자가 차량의 방향을 틀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핸들을 훨씬 더 세게 돌려야 한다.
또한 운전자의 안전과 직결되는 브레이크는 한두 번밖에는 쓸 수 없고 평소보다 세게 밟아야 한다. 곡선 도로에서 고속으로 주행하다 시동 꺼짐 현상이 나타날 경우 꼼짝 없이 대형 사고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시동 꺼짐 현상이 일어난 차량이 사고라도 났을 경우에는 에어백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차 안에 타고 있는 운전자와 보조석 탑승객의 피해도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런데도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자동차 시동 꺼짐 현상에 대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소비자원은 최근 공개된 ‘자동차 시동 꺼짐 안전실태 조사’를 위해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최근 4년간 접수된 시동 꺼짐 신고자 702명을 조사했다. 소비자원의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 시동 꺼짐 현상 신고 건수는 현대·기아차가 61.1%를 차지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약 70%의 점유율을 가진 현대·기아차가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는 것이 놀라운 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국내 점유율이 더 높은 현대차보다 기아차가 더 많은 신고 건수를 차지했다는 점은 의외다. 기아차는 243건의 신고건수로 34.6%, 현대차는 186건으로 26.5%를 차지했다. 한국GM이 117건으로 16.6%, 르노삼성이 79건으로 11.2%를 점유하며 그 뒤를 이었다. 수입차 중에서는 벤츠가 24건으로 3.4%, 폭스바겐이 14건으로 2% 수준이었다.
소비자원 관계자는 특정 차종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 이유로 ‘EGR밸브’를 원인으로 꼽았다. EGR밸브는 자동차 배기순환장치의 하나로 배기가스를 배출하기 전에 실린더 안으로 흡입하는 장치다. 소비자원에서 조사를 담당한 관계자는 “디젤 차량이 쓰는 EGR밸브 안에 카본이 껴서 공기가 여과망을 통과하지 못해 시동이 꺼지는 현상으로 보인다. 다만 EGR밸브 자체의 결함인지 운전자의 관리 소홀인지는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 관계자는 “다만 특정 차종이 높은 비율을 차지해 보이는 것은 조사 기간을 어떻게 설정했는지, 수리 이력이 있는지, 해당 차종이 출시한 시점은 언제인지에 따라 착시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서를 달며 “앞으로 보고서가 완성되면 자동차 업계 간담회를 통해 논의를 하고 시동 꺼짐이 많은 차량들에 대해서는 무상 수리 등의 자구 계획을 세우라는 권고도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자동차 시동 꺼짐 현상에 대해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수많은 부품이 들어가는 자동차에서 한 증상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에 당장 리콜 등의 대책을 논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고 답했다. 현대·기아차에 이어 많은 신고 건수를 보인 한국GM 관계자도 “GM 본사의 시동 꺼짐과 한국GM의 문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상관이 없다”며 “국내에서 발생한 시동 꺼짐 현상은 아직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제조물책임법 전문가인 하종선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시동 꺼짐 현상에 대해 미국에서는 엄격한 잣대로 조치하고 있고 결함은폐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쪽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수수방관하고 있어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결함은폐에 대해 미국보다 더 강력하게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할 수 있는 자동차관리법이 있지만 사문화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안전불감증은 개선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며 우려를 표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