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막힌 윗선의 기막힌 처벌?
경찰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시위 도중 농민 한 명이 사망해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일각에선 ‘살인경찰’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경찰을 맹비난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전과는 달리 경찰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최근 전현직 경찰들의 온라인 모임인 ‘무궁화클럽’에는 경찰 지휘부에 대한 공방이 한창이다. 경찰 시책을 비판해온 박 아무개 전 경사의 파면이 몰고온 논란이다. 최근엔 일선경찰들까지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사건의 내막을 캐봤다.
경기지방경찰청은 지난달 4일 경기 안산상록경찰서의 한 지구대 소속인 박 아무개 경사(41)를 파면했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파면 사유는 근무 태만 및 지휘부에 대한 인격 모독성 발언 등이었다. 경기 경찰청에 따르면 박 전 경사는 경찰청의 각종 치안 시책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절도사건을 묵살하고 순찰을 거르는 등 비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일선 경찰들은 박 전 경사의 파면 이유가 따로 있다고 보고 있다. 박 전 경사는 지난 2007년 10월 6일부터 올 4월 22일까지 사이버경찰청 경찰발전제안 코너에 총 17회에 걸쳐 성과주의 등 경찰 시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여기에는 현 정권 들어서 공권력을 과도하게 남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 간부가 승진을 대가로 거액을 받았다가 문제가 되자 돌려주고 현직을 유지시켰다’ ‘비리가 발각되면 스스로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했다’는 글도 있었다.
문제는 그의 글이 내부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현직 경찰관들만 접속할 수 있는 이 사이트에서 박 전 경사의 글은 파면 직전까지만 해도 3000여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동료 경찰관 300여 명이 추천했다고 한다.
일개 지구대 경사의 글이라고 생각해 무관심하게 대했던 경기 경찰청 지휘부도 반향이 커지자 관심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4월 22일 올린 글에서 “대통령·국회의원·장관·청장 등 모두 기회만 있으면 부정을 일삼는다”는 표현을 썼다.
다음날 곧바로 박 전 경사에 대한 경기경찰청의 감찰이 시작됐다. 그리고 열흘 뒤에 열린 징계위원회에서 파면조치를 받았다. 파면이란 해임보다 높은 수준의 조치로 해임은 퇴직금이 전액 지급되지만 파면은 퇴직금의 1/3만 지급되는 거의 최고 수준의 징계다.
그것으로 일단락될 줄 알았던 이 문제는 그러나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일선 경찰들이 박 전 경사의 파면에 대해 ‘지휘부를 비판하는 일선경찰에 대한 표적감찰’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던 것. 파면 이후 더 많은 경찰들이 관심을 보였다. 관련 글에는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리기도 했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파면 이유는 박 전 경사가 근무 시간에 인터넷을 사용했다는 것과 112를 통해 접수된 절도 사건을 묵살했다는 것 두 가지다. 근무시간에 인터넷을 사용했다는 것은 근무수칙 위반임에 분명하지만 중징계 사유로는 너무 옹색해 보인다. 그리고 112 신고접수에 대해 문제삼은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신고를 (사건으로 간주해) 다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지휘부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 경찰청은 박 전 경사에 대한 파면 결정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경기 경찰청 측은 “박 경사가 도민을 위한 치안시책에 대해 좋은 면은 한마디도 언급 않고 부정적인 면만 언급했다”며 “또 감찰 과정에서 4개월 동안 6건의 신고사건을 묵살한 것이 드러나 파면했다”고 설명했다.
▲ 경찰 온라인 모임 ‘무궁화 클럽’에는 박 경사 파면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 ||
5일 현재 무궁화클럽 내 ‘열띤 토론 마당’에 들어가 보면 박 전 경사의 파면을 비난하는 일선 경찰들의 글이 상당수 올라와 있다.
아이디 ‘촉석루’는 ‘공감하지 못할 파면의 징계처분 갈등, 그냥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가?’라며 문제를 제기했고, 아이디 ‘광운’은 ‘전선에 총알받이가 된 박 경사’라 표현했으며 ‘내리사랑’도 ‘쓴소리경찰 재갈 물리기’라고 지적했다. 또 아이디 ‘순복’은 ‘박 경사는 약자인 현장근무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며 옹호하기도 했다. 박 전 경사의 파면조치가 정당하다는 의견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박 전 경사의 파면 조치는 현재 경기 경찰청뿐만 아니라 전 일선 경찰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이슈가 돼버렸다. 경찰 일각에서는 박 전 경사를 돕기 위한 모금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무궁화클럽 사이트에서는 박 전경사의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글도 올라오고 있다. 현재 박 전 경사는 파면 조치에 불복해 소청심사를 제기한 상태다.
박 전 경사의 문제 이외에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전직 경찰이나 일선 경찰들의 분위기는 경찰 지휘부의 방향과는 많이 다르다. 여러 사안에 있어서 지휘부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경찰의 분향소 철거 논란과 관련 무궁화클럽 게시판에는 ‘서울청장의 옹색한 변명 경찰인임이 부끄럽다’ ‘한국경찰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등의 비난 글들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
한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현직 경찰들이 공적인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경찰이 너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며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인 괴리감을 느끼는 일선 경찰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내우외환’에 휩싸인 ‘민중의 지팡이’ 경찰. 내부의 비판마저도 ‘힘’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얻을 수 없다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