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조명 뒤론 치열한 생존경쟁
[특별취재팀=성기노 취재2팀장, 박민정 기자, 서윤심 기자]
다른 모델들과 달리 레이싱모델은 정해진 데뷔 경로도, 트레이닝 방법도 없다. 말 그대로 맨 몸으로 부딪쳐보는 거다. 미스디카, 제이엠엔터테인먼트 등의 소속사에 프로필사진을 보내 오디션을 본다. 이밖에도 대규모로 열리는 자동차나 게임 관련 행사에서 모델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면 지원하는 방식도 있다.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지난해 4월 열린 서울모터쇼에서 한 레이싱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소속사에서는 모델을 스튜디오로 불러 시험적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 레이싱모델 업계 관계자들은 신인 모델이 ‘뜨는’ 기준은 첫째도 둘째도 ‘외모’를 꼽는다. 아름다운 외모에 키 170㎝는 기본이다.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무조건 예쁘기만 해선 안 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레이싱모델은 귀여움과 섹시함 사이를 넘나들 줄 알아야 성공한다. 보통 10대 청소년 아니면 3040 아저씨들이 주요 팬층이다. 10대에게 어필할 귀여움과 아저씨들에게 어필할 섹시함을 겸비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아름다운 외모로 팬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도 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모델의 역할에 걸맞은 적절한 포즈 취하기와 근성은 필수다. 취재진이 지난 11월 9일 전남 영광의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KSF)에서 만난 팬들은 레이싱모델의 덕목으로 ‘미소’와 ‘교감능력’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일일이 팬들의 렌즈를 쳐다봐주고 그에 맞는 포즈를 취해줄 줄 알아야 팬들, 특히 마니아 사진가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아무리 예뻐도 사진 찍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면 인기는 금방 식어버리고 만다.
단독으로 활동하기에 팬 관리도 직접 신경 써야 한다. 모델과 팬이 소통하는 공간도 세심하게 챙긴다. 대부분의 모델들은 포털 사이트 다음에 팬카페가 있는데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 모델이라면 회원수는 천 명이 훌쩍 넘는다. 요즘 가장 ‘핫’한 모델인 허윤미의 경우 팬카페 가입자가 1만 3000명에 달한다. 모델들은 팬카페에 참여해 때때로 팬들과 대화하고, 정모를 개최하며 친목도 다진다. 현장에서 만난 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기억해주는 것도 인기를 얻는 비법이다.
아름다운 몸매가 자산인 모델들은 자기관리 없이 모델로 장수할 수 없다. 때문에 평소에도 운동으로 탄탄한 몸매를 만들어야 한다. 또 매니저 없이 각자 스케줄 관리를 하기에 게으름을 피우기도 어렵다. 긴 행사는 열흘까지 무대에 서야하기에 행사기간 내내 긴장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또 모델 대부분이 직업병으로 고생한다. 특히 ‘킬힐’을 장시간 신어야 하기에 발목과 다리 관련 질환을 하나쯤 다 갖고 있다. 정재훈 미스디카 대표는 “보통은 50분 일하고 1시간 쉬는 방식이다. 가끔 주최 측이 1시간 일하고 50분 쉬자고 요구하면 절대 안 된다고 거절한다. 10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모델들에겐 큰 차이다”고 설명했다. 안과질환도 고질병이다. 모델들은 예쁜 모습을 위해 눈동자를 크게 보이게 해주는 서클렌즈를 항상 착용한다. 렌즈만으로도 눈에 피로도가 올라가는데, 사진이 잘나오기 위해 모델들은 가능하면 눈을 깜빡이지 않기에 고충은 더 심해진다.
레이싱모델은 일일이 팬들의 렌즈를 쳐다봐주고 그에 맞는 포즈를 취해줄 줄 알아야 마니아 사진가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사진은 ‘2014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
심리적 압박은 신체적 부담보다도 크다. 한 행사장 안에서 동시에 레이싱모델들이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쟁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 나란히 서 있는 두 모델을 두고 어느 한 쪽에만 팬들의 카메라가 향한다면 그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다. 또 모터쇼에서는 모델들의 계급이 나뉘어 있기에 경쟁이 치열하다. 부스 하나당 자동차 옆에서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는 메인모델, 무대 한 단계 아래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는 서브모델, 또 관람객들의 편의를 돕는 플로어 모델이 있다. 혹여 신인모델이 메인모델로 발탁되는 날에는 선배 모델들의 눈총은 각오해야 한다. 경험이 많은 모델이 신인모델들과 경쟁하기 자존심 상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메인모델 오디션은 서브, 플로어 모델과 별도로 치러진다. 중견 레이싱모델들의 경우 “모델료를 받지 않을 테니 메인으로 세워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한참 인기를 누리던 2000년대 초반에는 ‘잘 나가는’ 레이싱모델이 연간 억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지금은 억대 수입을 올리는 모델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웬만한 대기업 직원의 월급 부럽지 않을 만큼 번다. 오토살롱, 모터쇼 등에서 메인모델은 하루 백여만 원까지 몸값이 나가기도 한다. 과거 유명 모델은 하루 300만 원 넘는 ‘몸값’을 올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레이싱모델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
큰 행사는 일 년에 몇 차례 되지 않기에 대부분의 일상적인 수입은 ‘보도사진’에서 온다. 자동차 관련 상품이나 카메라 등의 전자제품 홍보를 위해 신문지면에 싣는 사진의 모델을 서는 것이다. 건당 30만 원에서 40만 원 사이에 ‘시세’가 형성돼 있고, 거의 매일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델들의 주요 수입원이 된다. 또 팬들이나 인물사진을 찍고자 하는 아마추어 사진사들이 모델을 초청해 촬영회를 열기도 하는데 이것도 쏠쏠하다. 취재진이 전남 영암에서 만난 한 팬은 “모델료는 천차만별이다. 어느 정도 인지도와 인기가 있는 모델의 경우는 촬영회에 참여하는 사람당 6만~7만 원을 거둬 준다. 한 번 촬영회에 참여하는 사진사는 보통 10명 남짓이다”고 귀띔했다. 이 밖에 아프리카 BJ 활동, 인터넷 게임방송, 방송활동 등으로 부수입을 올리는 모델들도 다수다. 허윤미, 류지혜 등이 최근 들어 속속 아프리카 BJ 활동을 개시하면서 인터넷 방송활동이 모델들의 ‘오아시스’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레이싱모델과 연예계 역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모델 상당수가 연예계에서 활동했거나 데뷔 제의를 받기도 한다. 실제 서진아, 허윤미, 최슬기 등이 걸그룹으로 활동한 바 있다. 하지만 혹독한 트레이닝 과정, 적성 등의 문제로 모델로 ‘컴백’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미스디카의 정재훈 대표는 “레이싱모델을 그냥 직업인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킬힐과 플래시 때문에 고된 것도 직업의 한 단면이고, 성형과 섹시함에 기대는 것도 하나의 특성이다. 색안경 끼지 않고 성실한 직업인으로 모델들을 봐줬으면 한다”고 팬들에게 바람을 전했다.
특별취재팀
좌충우돌 취재 뒷얘기 “이렇게 특집을 해주니 감사해요” 특별취재팀이 아저씨 특집 3탄으로 레이싱모델 전격탐구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걸그룹, 아나운서 탐구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삼아 무리 없이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레이싱모델의 세계는 잘 알려진 걸그룹이나 아나운서 세계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우리 사회에서는 레이싱모델이란 직업이 아직 생소해서 그런지 앞서 1, 2탄으로 준비한 걸그룹과 아나운서에 비해 기초자료가 거의 없어 애를 먹었다. 본격적으로 레이싱모델을 탐구한 보도는 거의 없었고, 그들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아 기획단계부터 취재는 순탄치 않았다. 9일 전남 영암 국제코리아서킷에서 열린 ‘2014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에서 레이싱모델 은빈이 팬들에게 선물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본지 기자가 팬들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아니나 다를까. 취재는 처음부터 꼬여가고 있었다. 레이싱 팬들의 성지인 전남 영암(F1 대회가 열렸던 곳)만 가면 모든 게 진행될 줄 알았다.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KSF)은 국내에서 가장 큰 대회인데다 11월 8~9일에 열리는 경기는 결승전이었다. 많은 관중들과 레이싱모델, 카메라를 든 수많은 팬들을 상상하며 취재진은 왕복 10시간을 마다않고 영암으로 떠났다. 하지만 목포에 도착했을 때부터 기대에 조금씩 금이 갔다. 영암 레이싱 경기장으로 가달라고 얘기하자 택시 기사님은 “거기서 오늘 뭐 해요?”라고 되물었다. 지역 소식에 가장 빠삭한 택시 기사도 모를 정도라니….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모든 예상과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억새만이 펼쳐진 황량한 모습에 취재팀은 허탈한 웃음만 계속 지었다. 1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경기장 관중석에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상설 패독에 마련된 관람석에만 3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미디어센터, 오토캠핑장, 선수들이 이용할 수 있는 14개 동 규모의 팀 빌딩까지. 시설은 경기를 치르기 손색이 없었지만 관객은 없었다. 때문에 1, 2탄에서 진행해온 스티커 붙이기 방식의 현장 조사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300명 대상 현장조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레이싱모델 팬은 많이 잡아야 30여명이었다. 적은 수였지만 땅 끝 영암까지 따라온 ‘골수팬’들이었다. 모델이 나올 때마다 우르르 달려가 셔터를 누르는 건 기본, 얼마 남지 않은 빼빼로데이를 챙기기 위해 초코과자를 한아름 싸와 모델에게 안기는 팬도 있었다. ‘알짜배기’ 팬들만 만났지만 아저씨 특집의 ‘꽃’인 현장조사 없이 기사가 나가기는 무리였다. 급한 대로 다양한 군상이 모이는 서울역에서 설문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역은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장소인 만큼 사전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설문 전날 찾아갔을 때만 해도 얼마든지 진행해도 좋다고 했던 코레일 측에서 준비해간 설문조사 판을 보더니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사진이 선정적이어서 안 되겠는데요”라고 말하는 역무원에게 “길거리엔 핫팬츠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 여성들은 그럼 다 선정적인 거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 마지막 선택은 기사를 한 주 더 미루고 부산에서 열리는 게임축제 지스타에 가는 방법뿐이었다. 현장투표 장소를 세 차례 옮기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레이싱모델 업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줄 관계자를 찾아 얘기하는 과정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레이싱 관련 산업은 국가의 정책 실패로 죽은 면이 컸다. 레이싱모델이 전성기를 이루던 2000년 초반만 해도 용인에 있는 서킷에서 해마다 열린 레이싱모델 촬영 행사가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용인 서킷이 돌연 폐장하고 대체재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서킷이었지만 수도권과 거리가 상당해 팬들은 이전만큼 모이지 않았다. 또 지자체 간의 갈등 끝에 F1 경기는 접근성이 훨씬 떨어지는 전남 영암에서 치르게 되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관계자는 인터뷰 말미에 “근래 레이싱모델이 주목받을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특집을 해주니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재진이 레이싱모델들의 활동영역을 돌아다니며 목격한 그들의 인기는 걸그룹 못지않았다. 오히려 걸그룹이나 아나운서에 비해 더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델을 따라 말 그대로 팔도를 유람하는 ‘덕후’들이 대다수였다. 여기에 3040 아저씨 사이에 여전히 식지 않고 있는 카메라 열풍 속에도 레이싱모델들이 있었다. 출사 모델로 활약하며 아저씨들의 ‘예술혼’을 채워줄 ‘뮤즈’가 되어주고 있던 것. 취재 기초 조사를 위해 30대 남성 지인들의 의견을 물어본 결과 레이싱모델에 대해 빠삭한 이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취향을 밝히기 부끄러워하는 듯 ‘이쪽’ 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감추고 있었다. 레이싱모델은 행사를 빛내 주고 참가자들과도 직접 교감하는 소통의 중요한 교차로다. 매끈한 몸매와 깔끔한 매너는 덤이다. 이제 ‘아저씨’들도 색안경을 벗을 때가 되었다. [서] |
아저씨들 이것만은 쫌! 치마밑 렌즈·성상납 제의… 직업 특성상 외모로 평가받는 부분이 크기에 성형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다. 젊고 예쁜 후배들과 동일선상에서 경쟁해야 하기에 ‘시니어’ 모델들은 점점 성형을 고려하기도 한다. 또 다른 모델들에 비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외모 탓으로 돌리며 성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실 성형하지 않은 모델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던 모델이 약간의 ‘튜닝’을 하고난 뒤 ‘빵’ 뜬 사례도 꽤 있다”고 귀띔했다. 노골적으로 하룻밤을 요구하거나 ‘스폰서’를 해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레이싱모델 이수진이 2010년 한 방송에 나와 “하루 500만 원에 성상납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모델들에게 성상납 제의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직업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대부분의 모델들은 이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힘이 빠진다. 한국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라고 한탄했다. 또 자동차 관련 광고주와 모델 섭외 에이전시의 술자리에도 때때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모델들에겐 연애와 결혼도 자유롭지 않다. 팬들에겐 ‘여신’인 레이싱모델이기에 공개 연애나 결혼은 금기다. 개그맨 최군(아프리카 BJ 활동으로도 유명)과 열애를 고백한 허윤미를 제외하면 공개연애를 하는 모델은 거의 없다. 모델의 수명은 나이보다 결혼 여부에 따라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대 후반의 현역 모델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젊더라도 결혼을 하면 섭외 제의와 팬들은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 때문에 결혼을 해도 알리지 않는 모델도 많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