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정체 공범도 몰랐다
이 씨가 검거되자 9년 가까이 미제로 남아있던 사기 사건들이 줄줄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모두 주범이 밝혀지지 않아 종결된 사건들이었다. 수사 결과 이 씨는 가명만 일곱 개를 사용해 그와 함께 ‘일’했던 공범들도 그의 실제 이름을 몰랐을 정도로 철저히 신분을 숨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아무개 씨(55)의 사기행각이 처음 수면위로 드러난 것은 지난 2004년 초. 당시 이 씨는 꽃뱀 역할을 맡은 A 씨를 이용해 피해자들을 끌어들였다. 주로 40~50대 유부남에게 접근해 성관계를 맺어 신뢰하게 만든 후 가벼운 화투를 시작으로 도박판을 벌여 판을 점차 키우는, 전형적인 꽃뱀 사기 방식이었다.
이 씨는 당시 속칭 ‘월남뽕’이라는 게임을 이용해 사기행각을 벌였다. 열두 장의 화투를 두 장씩 엎어놓고 돈을 건 뒤, 뒤집었을 때 가장 높은 숫자에 돈을 건 사람이 이기는 방식의 게임이다.
패가 나오는 순서를 맞춰놓은 일명 ‘탄화투’를 이용한 이 씨의 수법을 당해낼 이는 없었다. 피해자들은 후에 사기도박단에 자신들이 당했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가족들에게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꽃뱀들의 협박에 돈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씨가 쳐놓은 그물에 걸린 피해자는 3명. 피해액은 3억여 원 정도였다.
그러나 이 씨 일당의 협박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가 신고했고 서울동부지검에서 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사기도박 혐의로 일당 4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정작 범죄를 설계한 이 씨만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다. 공범들이 진술한 이름으로는 그의 신분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것. 이 씨의 행방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다. 이 씨가 다시 검찰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년여 후인 2006년 3월경. 중국에 도박장을 차려놓은 일당에게 사기도박으로 거액을 뺏겼고 폭행, 협박을 당했다는 피해자 고소장이 수원지방검찰청에 접수되면서다.
검찰은 강원도 정선에 위치한 카지노에서 만난 사람에게 중국 사설 카지노를 소개받아 그곳에 가게 됐다는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알선책을 검거했다. 이후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두 달여 만인 5월경 B 씨 사건에 연루된 국내·외 공범들을 모두 검거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도 피의자들이 주장하던 실제 ‘주범’은 잡지 못했다. 주범은 바로 2년 전 꽃뱀사기도박사건을 일으키고 사라졌던 이 씨였다.
재밌는 점은 검찰이 수사 초기에 피의자들이 주장하는 주범을 가상의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씨와 함께 수개월 동안 사기행각을 벌인 공범들이 모두 그의 나이는 물론 이름까지 다르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중국 카지노 사기사건도 주범 이 씨만 ‘신원불명’으로 처리되고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수수께끼 같은 이 씨의 존재가 베일을 벗게 된 것은 2007년 6월. 서울남부지검에 중국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바카라’ 사기도박에 당해 18억여 원을 잃고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B 씨 외 2명이 공동명의로 고소장을 접수한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다.
그해 7월 검찰은 피해자들을 이 씨의 카지노로 안내해 준 알선책 2명을 검거한 데 이어 한국에 들어와 피해자들을 협박했던 공범 3명도 붙잡았다. 이때 국내에서 이 씨의 자금세탁을 해주던 김 아무개 씨(53)도 검거됐는데 이 씨의 실체는 김 씨에 의해 밝혀졌다. 김 씨는 자금세탁책이었기 때문에 신상명세 등 이 씨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신원조회 결과 이 씨는 사기도박 혐의로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되는 등 전과 4범의 인물로 드러났다. 이후 검찰은 1년여간 이 씨를 추적한 끝에 마침내 지난 8월 17일 이 씨를 검거했다.
한편 수사 과정에서 이 씨의 또 다른 범죄 사실이 드러났다. 2000년도 초를 시작으로 그동안 범인이 잡히지 않아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던 대여섯 건의 사기도박 사건의 주범도 이 씨로 밝혀진 것. 이런 이 씨의 신출귀몰함에 수사진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