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아내’ 내연녀 살인 때문에 들통
▲ 지난 2005년 6월 17일 경찰이 권 씨의 안방 밑을 뜯어낸 뒤 권 씨 아내의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사진제공=부산일보 | ||
지난 2005년 6월 8일 이경수 씨(가명·67)는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몇 시간째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직장 때문에 다른 지방 도시에 거주하던 이 씨는 부산 영도구에 사는 아내 정이숙 씨(가명·63)와 주말부부로 지내오던 터였다. 이틀에 한 번꼴로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안부를 물어오던 이 씨는 이날도 어김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는 한 동네에 사는 30년지기 권철수 씨(가명·67)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볼 것을 부탁했다. 잠시 후 권 씨는 “현관문이 잠겨 있다. 한참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고 전해왔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이 씨는 오전 10시경 자신의 집 1층에 있는 중국집 왕 아무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 한번 올라가봐 달라’고 부탁했다. 왕 사장은 가게 안쪽과 이어진 통로를 통해 이 씨의 집으로 올라갔다. 이 씨 집으로 들어선 왕 사장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집 안은 온통 피바다였다. 이내 옷가지와 이불로 덮여 있던 피투성이 사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씨의 아내 정 씨였다.
이것이 바로 2년 전 전국을 발칵 뒤집어놨던 ‘내연녀·아내 살인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부산 영도경찰서 강력5팀 서무성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사건이었다. 원한 등에 얽혀 두 생명이 희생됐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그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건 자체도 엽기적이었지만 사건을 풀어나가는 수사 과정도 정말 어려웠다. 이번 사례가 앞으로 사건 수사의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은 서 형사가 전하는 당시 상황.
“현장은 더없이 참혹했다. 정 여인은 온몸이 25군데나 찔려 살해됐는데 무려 14군데가 머리에 집중돼 있었다. 끔찍했던 사건 당시를 말해주듯 방 안에는 집기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피가 낭자했다. 또 두꺼비집 전원마저 차단돼 집안이 어두컴컴했는데 이는 범행 현장이 쉽게 발견되지 않게 하기 위해 범인이 한 짓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정 씨의 팔에서 여러 개의 ‘방어흔’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사망 전 정 씨는 범인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됐다. 현장에서는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한 단서라고는 방바닥에서 발견된 ‘별무늬’ 문양의 족적. 하지만 족적은 성인남성의 것으로 보기에는 작은 235~240㎜였다. 수사팀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서 형사의 얘기.
“창문이 뜯긴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현관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됐다. 또 사망 당시 정 여인이 외출복 그대로였다는 점에서 범행시간은 정 여인이 일을 마치고 귀가한 새벽 1시 30분에서 2시 사이로 추정됐다. 범인이 정 여인의 퇴근 시각을 알고 있었고 늦은 시각임에도 정 여인의 집에 무난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때 범인은 정 여인을 아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또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집안에서 없어진 물건이 없다는 점에서 치정이나 채무로 인한 원한살인으로 판단됐다.”
수사팀은 정 씨의 오른손 손톱 밑에 남아 있던 미세한 혈흔까지 채취,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유전자감식을 의뢰하는 한편 정 씨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수사팀은 정 씨 남편의 친구인 권철수 씨가 정 씨와 수년 전부터 내연관계로 지내왔다는 정황을 파악하게 된다. 특히 권 씨는 정 씨와 채무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권 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시간대에 집에서 자고 있었으며 다음날 오전 7시경 친구 이경수의 전화를 받고 정 씨 집에 가본 것 외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권 씨의 알리바이는 상당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문제는 사건이 벌어지던 시각 권 씨가 집에서 자고 있었는지 여부였다. 하지만 혼자 살고 있던 권 씨가 본인 주장대로 범행시각인 새벽 1시 반경 집에서 자고 있었는지를 달리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이때부터 수사팀은 권 씨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다음은 서 형사의 설명.
“권 씨는 평범한 반 대머리의 노인이었다. 사람을 그토록 무참히 살해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또 아무리 내연관계였다고는 하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살인까지 할 이유가 있겠나 싶었다. 더구나 권 씨는 정 여인의 영정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는가 하면 장지까지 따라가서 장례를 도맡아 진행해줬다. 권 씨는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도 단 한 번도 떨지 않고 침착하게 응했다. 하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예의주시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수사팀은 권 씨의 행동거지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권 씨가 정 씨 부부의 사생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가족 이상으로 이 사건 추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권 씨는 정 씨와 밤에 사적인 통화를 한 적도 많았다. 여러 정황상 그는 분명 의심스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수사팀은 권 씨를 좀 더 면밀히 조사한 결과 수년 전부터 권 씨 부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지는 서 형사의 얘기.
“권 씨에 따르면 2002년 10월 28일 아내가 노름에 미쳐서 도망갔다고 했다. 권 씨는 5일 후 직접 가출신고를 해놨더라. 그런데 아내의 가출에는 납득되지 않는 점들이 있었다. 권 씨가 아내를 찾으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 자식과 손자들에게 유독 애착을 보였던 권 씨의 아내가 자식들에게조차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는 점, 가출한 사람이 지갑이나 휴대폰 등 개인 소지품을 모두 놔두고 갔다는 점 등이 그랬다. 무엇보다 빠듯하게 사는 권 씨가 아내 이름으로 보험료를 2년 반 동안 매달 납입해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보험은 가출신고 후 5년이 지나면 실종으로 인정돼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권 씨가 ‘가출·실종자 생명보험금 수령’에 대해 상담을 한 적이 있다는 보험사 직원의 진술도 확보한 상태였다.”
정 씨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는 우선 권 씨 아내 실종사건 쪽으로 방향을 틀어 진행됐다. 다음은 서 형사의 회고.
“권 씨를 불러다 놓고 캐물었다. ‘아내와 사이가 어땠냐’는 질문에 권 씨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빛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는 불화가 잦았다고 하던데?’ ‘가출한 사람이 소지품을 놔두고 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들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권 씨에게 물을 담은 종이컵을 건넸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종이컵을 우그러뜨리더라. 권 씨가 손을 떨지 않기 위해 힘을 준 탓이었다. ‘뭔가 있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권 씨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직접증거가 없다는 것. 관건은 어떻게 그의 자백을 받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국과수에서 정밀감식 결과가 나오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정 씨의 손톱에 끼어있던 혈흔이 권 씨의 것으로 확인된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 권 씨를 살인 용의자로 확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어지는 서 형사의 설명.
“정 여인과 몸싸움이 있었는데 그후의 일은 모른다고 잡아떼면 이 ‘증거’는 소용없게 되는 셈이었다. 권 씨의 치밀한 태도로 볼 때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국과수 감식결과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자백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권 씨는 고성을 지르며 무죄를 주장했다. 권 씨는 ‘증거를 내놔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며 입을 닫아버렸다. 다음은 서 형사의 회고.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권 씨는 불교신자였다. 나는 그를 붙잡고 ‘당신이 분명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내가 그 한을 풀어줄 거라고 믿고 있을 거다.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나한테도 죄를 짓는 거다. 불교에서 인생이 힘든 것은 전생에 못 다 푼 업 때문이라고 한다. 업을 풀지 않으면 저승에서도 힘들다’고 설득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권 씨가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하는 거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라. ‘서 주사(그는 서 형사를 이렇게 불렀다), 내가 죽였소.’”
권 씨의 경찰 진술에 따르면 권 씨는 30년지기인 이경수 씨의 아내 정이숙 씨와 4년 전부터 몰래 정을 통해오던 사이였다. 사이가 깊어지면서 권 씨는 정 씨에게 용돈조로 돈을 주었는데 공식적으로 빌려준 5000만 원을 합하면 그 돈이 모두 1억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권 씨 아들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지게 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급전이 필요했던 권 씨는 정 씨에게 돈을 갚으라고 수차례 요구했지만 정 씨는 이를 거절했다. ‘사정이 급하니 일단 500만 원이라도 갚으라’는 요구에도 정 씨는 ‘당신은 그 돈 없어도 살지 않냐’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격노한 권 씨는 살해를 결심, 2005년 5월 28일 새벽 2시경 정 씨의 집 현관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하지만 정 씨가 중간에 깨어나 살해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인 6월 8일 권 씨는 정 씨가 퇴근하는 새벽 1시경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같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500만 원이라도 먼저 갚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정 씨는 거절했다. 결국 권 씨는 준비해 간 흉기로 정 씨를 마구 찌르고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 것이다.
정 씨 살인사건의 전모는 이렇게 드러났다. 하지만 수사팀에게는 아직도 풀어야 할 미스터리가 남아 있었다. 서 형사는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 권 씨를 상대로 아내의 실종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권 씨는 펄쩍 뛰며 부인했다. 이미 정 씨 살인을 고백한 이상 아내에 대해서도 순순히 털어놓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또 다시 설득이 시작됐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다 털고 가야 한다. 나는 정 여인 사건을 조사할 때 이미 당신이 아내의 실종과도 관련돼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내가 틀렸는지 한번 얘기해보자. 당신의 업으로 고통당할 자식들과 손자들을 생각해보라. 대체 아내는 어디 있나?’ 한참을 고민하던 권 씨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이러했다. ‘집에 있소.’”
수사팀은 즉시 권 씨 집 안방과 거실 콘크리트 바닥을 파헤쳤고 그곳에서 완전히 부패된 토막 사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출했다던 권 씨 아내의 시신이었다.
조사 결과 지난 2002년 10월 28일 권 씨는 아내와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던 중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사체를 안방 구들장에 묻고 3년 가까이 지내온 것으로 드러났다. “평소 나를 무시하는 아내에게 분노가 쌓여 있던 데다가 싸울 때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덤벼드는 아내의 행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 권 씨가 밝힌 ‘살인의 이유’였다. 다음은 서 형사가 전하는 당시 현장 상황.
“2003년 초 권 씨는 집 보수공사를 하면서 안방에 묻어놨던 아내 사체를 꺼내 이동시키려 했는데 묻을 장소가 좁아 결국 토막을 냈다고 한다. 머리는 침대 밑에, 몸통은 거실에 묻혀 있더라. 사체는 여러 겹의 비닐에 싸여 꽁꽁 묶여 있었는데 콘크리트를 어찌나 정교하게 발라놨던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권 씨는 아내를 죽인 뒤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해왔고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 형사는 정 씨 살인사건 당시에도 권 씨가 수사팀을 현혹시키려 했다면서 후일담을 전했다.
“권 씨의 범행은 67세 노인의 짓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했다. 권 씨는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일부러 자기 발보다 작은 사이즈의 신발을 신고 범행을 했다. 또한 정 여인을 죽이려는 1차 시도가 실패한 후에도 목수인 권 씨는 태연하게 화재로 엉망이 된 정 여인 집의 도배를 해주고 장판을 깔아주는 등 집수리를 도맡아 해줬다고 한다. 살인한 다음날 오전 온 동네사람들이 다 듣도록 문을 두드리며 정 여인을 불러댔던 것, 또 공공기관에 일을 보러 돌아다니는 등 확실한 알리바이를 짜놓은 것도 권 씨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결국 권 씨는 처벌을 받았지만 피해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