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큼 증오도 ‘국경’ 넘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사랑에 상처받은 한 여성이 벌인 잔혹살인극이다. 이 사건은 특히 외국 여성이 국내에서 저지른 범행으로, 당시 언론에 크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1991년 10월 19일 오전 11시 20분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한 여관. 정오가 다가오자 여관 종업원 A 씨는 30X호실에 퇴실을 독촉하기 위해 인터폰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객실 청소를 해야 하는 여관 측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A 씨는 결국 3층 객실로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프런트로 내려와 또다시 수차례 인터폰을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A 씨는 보조키로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A 씨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침대 위에는 한 젊은 남자가 피투성이 상태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확인결과 피살자는 전날 이 여관에 투숙했던 박준식 씨(가명·33)로 드러났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박 씨는 목과 가슴, 배 등 여러 군데에 자창을 입은 채로 죽어 있었다. 박 씨는 팬티와 러닝셔츠 차림이었는데 워낙 많은 피를 흘린 탓에 속옷은 물론 침대 시트까지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사체의 상태로 봐서 사망한 지 몇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였다.”
범인은 미리 준비한 흉기로 박 씨를 살해한 뒤 달아난 것으로 보였는데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팀이 가장 먼저 의문을 품은 것은 범행동기였다. 목과 가슴 등 치명적인 부위만 골라 정확히 찔렀다는 점에서 범인은 의도적으로 박 씨를 살해한 것이 분명했다. 특히 금품이나 현금이 전혀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강도에 의한 범행은 아닌 것으로 판단됐다.
전날밤 객실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도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여관 종업원들도 객실 손님 외 수상한 사람이 출입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살해수법이 잔혹하다는 점에서 수사팀은 처음부터 원한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수사를 진행했다. 따라서 수사는 피해자의 신상에 관한 것부터 시작됐다.
조사 결과 박 씨는 서울의 한 대학 중어중문학과 강사로 그 시절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로 밝혀졌다.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지난해 초 7년여간의 대만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박 씨는 교수를 꿈꾸며 강단에 서왔던 열정적이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박 씨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하지만 용의자를 추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사팀이 주목한 인물은 사건 전날 박 씨와 함께 투숙했다는 여성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박 씨는 사건 전날 밤 10시 30분경 이 여관에 투숙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관 종업원의 진술에 따르면 박 씨는 묘령의 여성과 동반투숙했는데 두 사람은 중국말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여성은 그날 자정께 홀로 객실에서 나왔다.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혼자 나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종업원이 무심결에 여자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자 여자는 몹시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영어로 ‘Hom Home’이라고 말하더니 도망치듯 나가 서둘러 택시를 탔다는 것이었다.”
박 씨 주변의 여성들을 조사한 결과 수사팀의 레이더에 오른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박 씨와 가까이 지내던 대만여성 진설옥(가명·37)이었다. 여관 종업원들을 상대로 확인한 결과 수사팀은 사건 전날 박 씨와 함께 투숙한 여인이 진 씨라는 진술을 확보했다. 또 박 씨의 가족들 및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실시한 수사팀은 진 여인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기에 이른다.
수사팀은 진 여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외국인이었다. 출입국내역을 조회하던 수사팀은 진 여인이 박 씨가 피살된 다음날 오후 2시 30분 대만 타이베이행 중화항공편으로 출국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한 발 늦은 것이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진 여인은 박 씨가 대만에 유학할 당시 현지에서 사귄 여성이었다. 진 여인이 박 씨보다 네 살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랫동안 연인관계로 지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진 여인이 한때 연인이었던 박 씨를 잔인하게 살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박 씨는 1983년부터 1990년 초까지 대만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박 씨는 낯설고 힘든 외국생활을 하면서 진 여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현지 상황을 잘 아는 진 여인은 박 씨가 유학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박 씨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졌다고 한다. 문제는 결혼에 대한 의견충돌이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진 여인은 박 씨에게 결혼을 요구했으나 박 씨는 그녀를 결혼상대로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 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 씨는 진 여인의 결혼 요구를 거절했고 날이 갈수록 그녀를 멀리했다. 총각이었던 박 씨와 달리 진 여인은 이미 결혼 경력이 있었으며 아이까지 있었다. 이쯤되니 수사팀으로서는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치정살인이 분명했다.”
결혼 문제를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리고 박 씨가 귀국한 후 다른 여성과 약혼까지 하자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박 씨는 결혼을 앞두고 관계를 정리하려 했던 반면 진 여인은 끝까지 박 씨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진 여인은 박 씨가 귀국한 1990년 3월부터 박 씨를 만나기 위해 무려 10여 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진 여인은 박 씨와 다투는 와중에서도 틈만 나면 박 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서버린 박 씨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박 씨의 마음은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진 여인에게서 더 멀어져갔다.
수사팀은 배신감에 치를 떨던 진 여인이 한국에 들어와 박 씨를 살해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사건 당일 박 씨를 만나 함께 투숙한 것도 진 여인의 철저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범행 직후 바로 달아날 수 있도록 비행기 티켓까지 사전에 마련해놓았던 것으로 보아 이는 명백한 계획살인이었다. 하지만 진 여인이 이미 출국한 상황이라 수사팀은 대만정부와 인터폴에 공조수사협조를 요청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진설옥에 대한 행방은 며칠 후 밝혀졌다. 수사팀은 사건 발생 우연히 진 여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사건발생 5일 후인 23일, 사무실에 있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사업차 대만에 갔다온 한 남자의 전화였다. 그는 현지에서 우연히 신문을 사봤는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서울에서 변심한 한국 남자를 살해하고 돌아온 여자가 경찰에 자수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진설옥을 떠올랐다. 즉시 당시 사건관할이던 마포경찰서 수사팀에 통보하고 진위를 파악하도록 조치했다. 확인결과 대만에서 자수한 그 여자는 진설옥으로 판명됐다.”
진 여인은 대만에 입국한 지 사흘 동안 은신해 있다가 10월 22일 자신의 주거지 관할인 대만 고웅시 경찰에 자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박 씨 피살과 관련된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백했다.
조사 결과 진 여인의 범행은 국내 수사팀의 예상대로 질투와 배신감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치정살인으로 드러났다. 변심한 남자에 한을 품은 여성이 일으킨 참극이었던 것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