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에서 건져낸 것은 40~50대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시신의 상태였다. 나체 상태의 시신은 손발을 비롯한 온몸이 쇠사슬로 결박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체에는 20㎏짜리 유압잭 2개가 매달려 있었다. 일단 타살임이 확실했다.”
사체의 상태로 보아 남자는 살해된지 2~3일 정도 지난 것으로 판단됐다. 수사팀은 곧바로 신원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주검의 주인공은 광진구 자양동에 사는 강만식 씨(가명·43)로 밝혀졌다. 조사결과 강 씨는 12월 6일 저녁부터 행적이 묘연한 상태였다. 실종된 지 사흘 만에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남자.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사팀은 강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일차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강 씨는 십수 년 전부터 평화시장에서 ○○금속이라는 상호를 걸고 장사를 해오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강 씨의 주업은 장사가 아닌 사채업이었다. 경찰 조사결과 강 씨는 평화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해왔는데 월 평균 2억 원대의 어음과 수표할인을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실종 전 강 씨는 여느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저녁 무렵 퇴근길에 오른 것이 강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측근들은 오랫동안 상인들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하면서 쏠쏠한 수입을 챙겨오던 강 씨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측근들은 물론 가족들도 강 씨의 이후 행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수사팀은 강 씨와 금전거래를 해온 인물들을 상대로 일차적인 조사를 진행하면서 실종 전후 강 씨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강 씨와 거래가 있었거나 강 씨가 만나고 다닌 사람들에 대한 탐문 수사가 진행된 것이다. 특히 수사팀은 범행수법이 몹시 잔인하고 온몸에 쇠사슬을 감아 수장시키는 등 사체처리 수법이 치밀한 것으로 보아 최소 2명 이상의 범인이 가담했을 것으로 보고 동일수법 전과자 등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의심이 가는 인물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가 제자리에서 맴돌며 수 일째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후 수사팀은 뭔가 석연찮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다.
“바로 강 씨 가족들의 지나치리만큼 의연한 태도였다. 수사팀이 보기에 강 씨의 가족들은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 가장의 죽음에 대해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의 아내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점은 그 뿐이 아니었다. 강 씨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두고 수사팀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의 행적을 추적했으나 12월 6일 저녁 퇴근한 이후로 그를 봤다는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실종 전후 강 씨와 접촉한 인물이 없다는 점은 가장 큰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강 씨의 가족들은 강 씨가 실종된 후에도 찾으려는 노력을 일체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강 씨의 행방에 대한 수사팀의 질문에도 일체 입을 닫았다. 수사팀은 조금씩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강 씨의 가정불화를 둘러싼 소문들도 들려왔다. 강 씨의 주변인물들은 강 씨의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원만한 가정생활을 유지하지 못했으며 평소 아내 윤미희 씨(가명·44)와 심각한 갈등을 빚어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순히 가정불화로 인해 윤 씨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십 군데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후 쇳덩어리를 매달아 수장시킨 범행 수법은 여자인 윤 씨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윤 씨의 행동은 분명 어색했다. 또 강 씨의 다른 가족들 역시 뭔가를 감추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특히 몇 번의 반복되는 조사과정에서 윤 씨를 비롯한 가족들은 실종 전후 강 씨의 행방은 물론 사건당일 본인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진술을 번복하는 등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수사팀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윤 씨는 12월 17일 자포자기한 듯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이 사건은 강 씨의 아내 윤 씨가 동생부부와 함께 남편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제3자를 끌여들여 저지른 청부살인사건으로 드러났다.
조사결과 윤 씨는 같은 해 9월 중순부터 남편 강 씨를 살해하기로 동생 부부와 뜻을 모았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윤 씨는 결국 12월 6일 자정께 여동생의 남편인 박영식 씨(가명·39)의 소개로 알게 된 임태수 씨(가명·42) 등 3명에게 집 안방에서 잠든 남편을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강 씨를 살해하는 대가로 3억 원을 받기로 한 임 씨 등은 결국 깊은 잠에 든 강 씨를 둔기로 수차례 때려 살해하고 청평호로 싣고 가 물 속에 사체를 유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윤 씨가 남편을 살해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평범한 주부였던 윤 씨가 이처럼 끔찍한 청부살인을 지시했다는 사실에 수사팀은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범행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다.
“수사관들 앞에서 윤 씨는 경찰에서 ‘딸 때문에…. 딸 때문에 그랬어요!’라고 울부짖었다. 수사팀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은 윤 씨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간의 악몽 같았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윤 씨는 그동안 강 씨로부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쯤되면 수시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살해한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강 씨는 그동안 친인척을 성폭행하는 몹쓸 짓을 저질러 왔으며 1년 전부터는 자신의 친딸까지 수시로 유린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믿기지 않는 말에 수사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 씨의 진술은 모두 사실이었다. 강 씨의 친인척들은 강 씨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처제를 비롯한 친인척 등을 성폭행하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몹쓸 행각을 벌여왔다”고 증언했다. 윤 씨와 친인척들에 따르면 강 씨의 성폭행에는 정해진 상대가 따로 없었다. 강 씨는 과거 한 집에 살던 처제와 유부녀인 친인척들을 무차별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어린 조카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는 파렴치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강 씨는 급기야 자신의 친딸(20)을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다.
“강 씨는 일년 전 12월 등교길에 친 딸을 여관으로 데려가 성폭행한 후 줄곧 딸을 성노리개 삼아왔다고 한다. 윤 씨는 ‘큰딸이 남편에게 처음 당하던 날 딸애와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당시 윤 씨는 아무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강 씨의 포악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 씨는 딸의 상황을 알고서도 강 씨의 폭력과 감금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윤 씨는 ‘남편은 밤마다 나를 흠씬 두들겨 팬 뒤 안방에 가둬두고 딸아이 방으로 향했다. 나는 방안에 갇힌 채 딸이 남편에게 겁탈당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자식을 보호해야 할 어머니로서 윤 씨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그동안 남편의 엽기적인 성 행각을 알고서도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윤 씨는 남편이 급기야 친딸까지 상습적으로 성폭행하자 응징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간의 심적 고통이 어찌나 컸던지 조사과정 내내 윤 씨는 ‘남편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었다’고 울부짖었다. 그녀는 ‘짐승만도 못한 남편을 죽인 데 대해 아무 죄책감이나 후회가 없다. 남편과 함께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들은 지옥이었다. 오죽하면 아이들도 아빠가 죽었다는 말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까’라며 치를 떨었다.”
윤 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자 여성단체들은 윤 씨는 청부살인 사건의 가해자이기 전에 심각한 가정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주목할 점은 당시 강 씨의 친동생들마저 강 씨의 행실을 탓하면서 윤 씨의 선처를 호소했다는 사실이었다. 윤 씨의 시동생은 “친딸을 성폭행하다니…. 형수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나”며 탄원했다고 한다. 특히 윤 씨의 시누이는 “오빠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다. 법만 아니었으면 내가 일을 저질렀을 정도로 오빠의 행위는 용서받기 힘든 것이었다”고 호소했다. 그녀는 “같은 여자로서 불쌍한 올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윤 씨는 냉정한 법의 심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 3년을 선고받은 윤 씨는 복역 중이던 1998년 8·15특사로 가석방됐다. 윤 씨가 복역 중일 땐 시누이들이 꾸준히 면회를 간 사실이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