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저 원수를 어찌 하오리까’
▲ 1994년 2월 종교연구가 피살 사건의 범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약 15년 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일명 ‘종교연구가 손창익 씨 피살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아들 민수 씨에 따르면 이날 두 사람은 함께 아파트에 도착했다. 차에서 먼저 내린 손 씨가 먼저 아파트에 올라갔고 민수 씨는 주차를 하고 뒤따르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파트 2층에서 ‘퍽’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비명이 들렸다고 한다. 황급히 뛰어가보니 손 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민수 씨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범인이 도망친 후였다’고 진술했다.”
조사결과 손 씨의 주검에서는 목 부위의 상처 외에 뒷머리에도 흉기로 맞은 흔적이 발견됐다. “목의 경동맥·정맥·식도 등이 절단되어 많은 피를 흘렸으나 두개골은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 부검의의 소견이었다.
수사팀은 애초부터 이 사건이 단순 강도사건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우선 손 씨가 아들 민수 씨의 승용차에서 내린 뒤 불과 1~2분 만에 피습을 당했다는 점은 범인이 숨어서 기다리다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범인은 평소 손 씨의 귀가시간이 밤 10시~10시 30분으로 비교적 규칙적이었다는 것을 아는 등 손 씨의 스케줄을 훤히 꿰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정확히 급소를 찔러 살해한 수법이나 범행 직후 신속하게 현장을 벗어난 것을 볼 때 사전답사와 준비과정을 거쳐 이뤄진 계획범행이었다. 특히 범행이 치밀하고 재빠르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전문가가 고용된 청부살인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수사팀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살해된 손 씨의 신분이었다. 손 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문제연구가로서 60년대부터 사이비 종교의 실태와 폐해를 끈질기에 추적하고 폭로해온 인물이었다. 손 씨는 이로 인해 일부 종교단체의 광신도들로부터 끊임없이 협박을 받아왔으며 실제로 10여 차례에 걸쳐 습격을 당하기도 했었다.
원한살인. 수사팀이 잠정적으로 내린 범행동기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은 손 씨의 가족과 주변인물, 그가 운영하는 회사 관계자 등을 상대로 그의 최근행적과 원한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종교문제를 제외하고는 원한을 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손 씨는 그간 온갖 위협과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종교문제를 연구해왔으며 원칙적이고 반듯한 성품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상당히 평이 좋았다. 이에 수사팀 내부에서는 손 씨에게 불만이 있는 종교관계자나 광신도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됐다.
당시 손 씨는 Y교의 폐단을 밝히는 일에 주력해왔는데 피습 며칠 전 TV에도 출연해 Y교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손 씨의 가족들은 방송이 나간 후 손 씨의 사무실과 집에 ‘계속 그런 행동을 하면 죽여버리겠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협박전화가 수차례 걸려왔다고 진술했다. 사건 당일에도 손 씨는 Y교 신자로 안수를 받던 중 사망한 신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안양에서 열린 민주당 인권위 Y교 피해 대책협의회 회의에 참석한 뒤 귀가하던 길이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손 씨는 분명 일부 종교 관계자들에게 있어 눈엣가시같은 존재임이 분명했다. 이에 수사팀은 사건 전 손 씨의 행적을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변 사람들은 “Y교 교주가 구속수감된 이후 손 씨는 Y교 실종·사망 피해자에 대한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를 촉구하고 실종자들의 시신을 찾아나서는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그쪽 관계자들로부터 더욱 큰 신변의 위협을 받아왔다”고 증언했다.
과연 손 씨에게 앙심을 품은 Y교 관계자의 소행이 맞는 것일까. 의심은 갔지만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손 씨의 피살사건이 알려진 후 일각에서 의혹을 제기하자 부담을 느낀 Y교 측에서는 “손 씨가 그간 이탈 신도를 포섭, Y교를 비롯한 신흥종교에 갖은 협박을 가하며 괴롭혀 왔지만 현재 교주가 구속되어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교주에게 누가 되는 이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며 제단의 내부를 공개하는 등 사건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수사팀은 사건이 발생한 시각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목격자를 찾는 동시에 현장에서 범행에 사용된 쇠파이프와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 2개, 아파트 2층 복도 출입구에서 발견된 유효한 지문 몇 점과 1층 베란다에 남겨진 혈흔 등을 채취,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정밀감정을 의뢰했다. 모든 단서는 현장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수사팀은 범인이 남긴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현장을 샅샅이 훑었고, 그 결과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기에 이른다. 바로 현장에 남아있던 종이달력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이 얘기.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는 쇠파이프를 쌌던 종이달력이 결정적이었다. 수사팀은 달력의 출처를 추적했고 달력뒷면에 적힌 D 교회 신도 명단을 확보, 이들을 상대로 사건 당일 알리바이 등을 조사한 결과 범인이 드러났다. 범인의 이름은 양동철(가명·26). D 교회에서 잡부로 근무하던 청년이었다. 19일 밤에 경찰에 소환된 양 씨는 ‘사건발생 시각 교회에서 기도 중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수사팀은 달력종이 등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한 데다 그가 그 시각 교회에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교회 내의 달력들을 소각하도록 지시한 A 목사로부터 ‘양동철이 범인’이라는 진술을 이미 받아낸 상태였다. 범행 후 속초로 내려간 양 씨는 19일 오전 A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손 씨 살해를 진술하며 ‘쇠파이프를 현장에 두고 왔는데 달력이 문제될 것 같으니 태워달라’는 부탁을 받고 교회관계자를 통해 사무실에 있는 달력 20여 개를 소각했다는 것이었다. 양 씨는 동료와 미리 짜놓은 알리바이를 주장하며 범행을 끈질기게 부인했지만 달력 소각 과정 등을 추궁하는 수사팀 앞에서 21일 새벽 결국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만 사흘째되는 날이었다.”
양 씨의 자백에 따라 범행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18일 오후 8시께 손 씨의 아파트 입구에 도착, 손 씨를 기다리고 있던 양 씨는 10시가 넘어 손 씨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뒤따라 올라갔다. 머리를 쇠파이프로 내리치자 손 씨가 쓰러졌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손 씨를 보고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것 같아 군시절부터 소지하고 다니던 스킨스쿠버용 칼로 목을 찔렀다. 범행 후 자살을 결심하고 속초로 향하던 중 양 씨는 손 씨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게 됐고 다음날 오전 10시경 A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범행사실을 얘기하고 달력처리를 부탁했다.
양 씨의 자백 등을 토대로 범행 후 도주경로를 추적하던 수사팀은 양 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 범행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칼의 행방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광명시 인접 개천에 칼을 버렸다’는 양 씨의 자백에 따라 이 일대를 수색한 끝에 23일 오전 구로구 개봉3동 철산교 밑 목감천 물속에서 28cm의 일제 스쿠버용 칼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양 씨가 손 씨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양 씨의 자백에 따르면 범행동기는 종교적 원한이었다. 양 씨는 “손 씨가 참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목사님과 우리 교회를 계속 사이비·이단으로 규정하고 모욕적인 말로 매도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번 사건이 과연 양 씨의 단독범행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우선 양 씨의 전력으로 볼 때 2분여의 짧은 시간동안 범행이 이뤄진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범행장소가 주민들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었던 아파트 내부라는 점, 범행시간이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 살인에서부터 도피까지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점 등은 범인이 숙달된 전문가이거나 적어도 2~3명의 공범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또 범행 후 양 씨가 아무 연고도 없는 속초로 도주했다가 이후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석연찮은 점은 범행동기였다.
조사결과 당시 손 씨는 D 교회와는 별 마찰이 없었다. 더욱이 손 씨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도 없던 양 씨가 손 씨에게 살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다. 맹목적인 신념이나 충성심에 사로잡혀 했다고 보기에는 동기가 너무 약했던 것이다. 때문에 양 씨의 단독범행이 아니라는 주장과 더불어 공범 및 배후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실제로 경찰 수사 과정에서 D 교회 관계자들이 범행은폐에 개입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는 등 공모 및 사주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증거물인 달력을 소각하고 피 묻은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했으며 양 씨에게 도피자금을 주는 등 교회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범행 은폐를 기도했던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수사팀이 특히 주목한 것은 교회 원로 목사인 B 목사의 개입 여부였다. 양 씨와 이들 간부들이 평소 B 목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수족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수사팀 내에서는 “B 목사가 직접 사주하거나 지시하지는 않았더라도 ‘종교적 암시’ 등을 통해 양 씨가 범행을 결심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양 씨는 범행 사전 모의 의혹 등에 대해 “나 혼자 생각하고 충동적으로 실행한 것이다. 혼만 내주려 했을 뿐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 교회 관계자들의 사주 및 공모,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사건발생 후 12일간에 걸쳐 진행된 경찰수사는 ‘양 씨의 입에만 의존한 졸속수사이고 공범 및 배후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유족들과 일각의 비난을 뒤로한 채 검찰로 넘어갔다. “범행은 양 씨의 단독범행이며 양 씨로부터 범행사실을 전해들은 A 목사 등 교회관계자들의 범행은폐 기도가 있었다”는 것이 경찰의 결론이었다. 애초에 수사팀이 집중적으로 파헤치려했던 D 교회 관계자들의 사전공모 또는 사주 의혹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단서도 확보하지 못했다.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항소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의 범행은 엄벌에 처해 마땅하나 피고인이 뉘우치고 있고, 특히 피해자의 유족들이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요지의 탄원서를 제출한 점을 감안해 형량을 낮춘다”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눈에 띄는 점은 1994년 12월 1일 피살된 손 씨의 가족이 양 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다. 손 씨의 가족은 탄원서를 통해 “양 씨가 저지른 죄는 미워할 수 있어도 인간을 미워할 수는 없다. 새 인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회고
뚜껑 열린 '사이비종교'
“당시 이 사건의 파장은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사건은 무모하고 그릇된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한 청년이 저지른 사건이었지만 그 속에는 고질적인 여러 가지 종교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이 사건은 사이비 종교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었죠. 사건 직후 당시 PC 통신상에서는 수많은 토론방이 열려 연일 이 사건을 놓고 사이비 종교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었습니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수많은 통신인들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했으며 사이비 종교 문제에 대한 대국민적 관심을 끌어냈습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