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수행 비서 폭로 “800억대 비자금 지금도 차명 관리”
박철언 전 장관(왼쪽)을 고발한 최측근 김 씨가 박 전 장관이 작성한 ‘비망록’을 토대로 정리했다는 ‘비자금 총액 문건’. 이 문건에 적힌 이름만 50여 명, 금액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다양하다. 오른쪽 작은 사진들은 비망록으로 추측되는 문건 사본.
지난 23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박철언 전 장관의 최측근 인사인 김 아무개 씨(51)가 들어섰다. 김 씨는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과의 짧은 인터뷰를 끝으로 고발장을 접수하고 서둘러 빠져나갔다. 김 씨의 주장은 간략했다. 박철언 전 장관, 현경자 전 의원(신민당) 부부가 자신을 포함한 직원, 지인, 친인척을 동원해 차명계좌로 예금을 관리했고 이중 일부는 자녀들에게 불법 증여돼 세금을 탈루했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박 전 장관 부부가 보유했다는 비자금의 액수다. 김 씨에 따르면 박 전 장관은 570억 원, 현 전 의원은 230억 원으로 총 800억 원가량의 차명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장관 부부는 지난 30여 년간 차명계좌를 통해 돈을 관리해왔고 현재까지 비자금과 차명계좌는 존재하고 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김 씨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김 씨를 잘 아는 한 최측근에 따르면 “증거는 확실히 존재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비자금과 차명계좌를 뒷받침해줄 만한 상세 내역이 있다는 것. 그동안 김 씨 측은 박 전 장관 부부의 차명계좌 내역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자료를 정리해왔다고 한다. 특히 김 씨는 박 전 장관을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약 20년 동안 보좌한 ‘총무국장’ 출신이다. 그만큼 박 전 장관과 관련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게 김 씨 측의 주장이다.
<일요신문>이 김 씨의 최측근으로부터 확보한 ‘비자금 총액 문건’에 따르면 이러한 계좌 내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문건에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의 이름, 거래 은행, 계좌번호, 거래 기간, 금액 등이 명시돼 있다. 해당 명단에는 박 전 장관 부부의 지인이나 친척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박 전 장관의 친동생으로 추정되는 박종언 씨(현대중공업 전 이사)나 한때 박 전 장관과 소송을 벌였던 강 아무개 교수와 그의 가족들의 이름도 명시돼 있다. 문건에 적힌 명단만 50여 명, 금액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다양했다. 최측근 A 씨는 “문건에 등장한 이들은 모두 친인척이나 지인들이다. 박 전 장관은 이런 내역들을 비망록에 직접 써서 관리해왔다. 추후 비망록을 입수할 수 있었고 이것을 토대로 비자금 내역을 정리했다”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고발장을 접수하면서 해당 증거자료들을 모두 검찰에 넘겼다고 한다.
비자금 증거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김 씨가 고발까지 이르게 된 배경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고발 시기다. 김 씨는 20년 동안 비자금 실체를 침묵하고 있다가 이제야 고발한 이유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법은 공평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사법정의 구현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시기를 저울질하다가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박 전 장관 비자금 의혹은 올해 초부터 유독 불거지기 시작했다. 지난 1월 대검 범죄정보1담당관실에서는 박 전 장관 부부의 비자금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대검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범죄정보 수집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대검 쪽에 첩보를 전달한 이는 박 전 장관의 처남이자 현 전 의원의 동생인 현 아무개 씨로 파악된다. 현 씨는 최근 <일요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내사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별다른 진행상황이 없는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김 씨 역시 당시 대검 내사 과정에서 직접 검찰에 출석해 비자금과 관련한 진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진전이 없자 결국 김 씨가 직접 나서서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게 한 측근의 말이다. 김 씨와 함께 고발장을 작성했다는 한 측근은 “고발장을 접수하기까지 수많은 제보들이 검찰이나 국세청 쪽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라고 전했다.
한편 <일요신문>이 입수한 김 씨의 고발장에 따르면 김 씨가 박 전 장관의 수행비서로 근무하면서 ‘은행심부름’을 하게 된 과정과 박 전 장관 부부의 비자금에 관여했던 사람들, 2008년 당시 박 전 장관이 강 아무개 교수와 소송을 벌이며 불거진 비자금 의혹에 대한 내용들이 나타나 있다. 고발장에 따르면 김 씨는 박 전 장관이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비서실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박 전 장관이 체육청소년부를 물러날 당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받아 박 전 장관의 마포 개인 사무실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후 1993년부터 개인 수행비서로 새벽부터 일과가 끝나는 밤까지 일하며, 1995년 이후에는 총무과장과 총무국장으로 재직했다고 밝혀져 있다. 박 전 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고발장에 따르면 김 씨는 애초 박 전 장관의 은행심부름을 맡던 김 아무개 보좌관이 퇴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은행심부름을 맡았다고 한다. 한때는 200억 원 정도의 자금을 심부름하게 되었으며, 박 전 장관이 1993년 5월경 슬롯머신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었을 때, 박 전 장관의 숙소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거들어 주면서 현 전 의원의 자금도 심부름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박 전 장관이 1994년 9월 출소한 후 2000년까지 계속 자금 입출금 심부름을 했다고 적혀 있다. <일요신문>은 더욱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김 씨 측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결국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향후 수사 향방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박 전 장관의 비자금 의혹 실체를 밝히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설사 비자금이라고 해도 이미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나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각각 7년, 5년)가 지나 적용하기가 어렵기 때문. 실제로 ‘비자금 총액 문건’에 명시된 계좌 거래 기간은 대부분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에 집중돼 있다. 한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시기가 많이 지난 만큼 계좌 추적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증여나 세금포탈 관련해서는 수사를 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검찰 역시 해당 고발 사건을 탈세, 금융실명제 위반 등을 담당하는 형사 4부에 배당했다. 그만큼 수사가 비자금 실체보다는 탈세 쪽에 기울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거대한 액수의 비자금 의혹이 이미 수차례 제기됐고 제보자와 증거자료 등의 신빙성이 높은 만큼 철저한 수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고 있다.
한편 이러한 김 씨의 고발과 비자금 의혹에 대해 박 전 장관은 “김 씨가 친인척과 짜고 몇 개월 전부터 검찰이나 언론사에 내용을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차명계좌도 없고 비자금도 없다. 이미 2008년 수사 때 다 밝혀진 내용이다. 한 마디로 돈을 노리고 고발을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