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제친 아우, 정상까진 아직 멀다
‘포스트 신격호’ 자리를 놓고 후계자 무게 중심이 신동빈 회장 원톱체제로 이동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특히 신동빈 회장이 최근 ‘한일 롯데 공조’를 강조하며 광폭행보를 보여 ‘통합맹주의 굳히기’가 시작되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신동빈 회장이 완전히 롯데를 장악한 것은 아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 지분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신동빈 회장의 경영 성적표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도 가능한 상황이다. 롯데에 불어오고 있는 ‘두 형제의 난’을 집중 추적해봤다.
“이번 이사회 결정을 겸허하고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총괄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한국과 일본의 사업을 모두 책임지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한편 리더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
지난 7월 15일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이사회에서 참석자 전원 찬성으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반면 올해 1월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61)이 전격 해임되었다. 그 전인 지난해 말부터 그는 순차적으로 일본 롯데 계열사 임원직을 내려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신격호 회장의 경영구도 원칙이었던 ‘일본 신동주, 한국 신동빈’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셈이다.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을 장악한 일본 롯데홀딩스는 일본 롯데의 지주회사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담당하는 회사다. 재계에서는 이 장면을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뒤를 잇는 ‘후계자 대관식’으로 본다. 힘을 얻은 신동빈 회장은 대권을 장악한 뒤 연일 광폭행보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지난 7월 19일 ‘비전 2018’을 6년 만에 재정비하고 한일 롯데가 협력해 아시아시장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태국 방콕 중심부에 내년 3월 한일 롯데가 공동 출자하는 면세점도 출점할 계획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동생 동빈을 ‘세자’로 책봉한 배경에 대해 재계에서는 ‘신동빈 회장의 괄목할 만한 경영 성과가 아버지에게 크게 어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적이 말한다’는 일본 특유의 조직문화에 익숙한 롯데그룹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결정일 수도 있다. 신동빈 회장이 그룹업무를 직접 챙기기 시작한 건 2004년 롯데그룹의 컨트롤타워라 할 수 있는 정책본부장을 맡았을 때부터로 볼 수 있다. 그 때(2004년) 이후 롯데그룹이 인수한 기업만 30여 개, 인수금액만 9조 원에 달한다. 그룹 매출도 2004년 20조 원대에서 10년 뒤엔 80조 원대로 뛰었다. 그렇고 그런 대기업이었던 롯데가 신동빈 회장이 경영 전면에 뛰어들면서 톱 5에 들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덕분에 신동빈 회장은 2011년 한국 롯데그룹 회장직에도 무사히 안착했다.
10년 만에 롯데의 몸집이 이렇게 커지게 된 배경에 신동빈 회장의 뚝심이 결정적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롯데가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2006년 롯데쇼핑 상장이 계기로 손꼽힌다. 당시 확보한 3조 5000억 원이 시드머니가 된 것이다. 원래 신격호 총괄회장은 롯데쇼핑 상장에 미온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장을 하게 되면 경영권에 이런 저런 간섭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를 강하게 설득했고 그것을 토대로 상당한 경영성과를 직접 입증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아버지 신 총괄회장도 대권을 작은아들에게 물려줘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성과’면에서만 보면 일본의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본 롯데는 주력상품인 껌이 시장 점유율은 압도하고 있지만 껌 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있어 매출액이 계속 감소 추세다. 과자 이외의 사업도 둔화되고 있어 2014년 3월기의 일본 롯데홀딩스의 매출액은 전 분기 대비 27% 줄어든 4077억 엔으로 크게 줄었다. 또 지난해 신동주 전 부회장이 추진했던 껌 리뉴얼 등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해 껌 사업에 애착이 강한 아버지의 신망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기에다 상대적으로 신동주 전 부회장이 맡은 일본 롯데는 한국 롯데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규모라 사업 확대가 더뎠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신동빈 회장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후계자 선정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또 신격호 총괄회장은 일본에서 성장했는데 일본 문화는 꼭 장남이 아니어도 능력이 있으면 차남, 3남에게 승계하는 게 드물지 않다. 능력에 따라 사위가 성을 바꿔 승계를 받기도 한다. 때문에 신격호 총괄회장 입장에서는 사업수완도 좋고 실적이 뛰어난 차남인 신동빈 회장이 승계를 하는 게 전혀 어색할 게 없다.
그런데 이런 ‘세자 책봉’ 과정에서 집안의 불화설도 흘러나왔다. 먼저 신동주 전 부회장의 경우 불과 4~5년 전만 해도 롯데가의 장자로서 후계자의 위치가 굳건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역전돼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먼저 신 전 부회장의 해임이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뜻이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올 1월 신동주 전 부회장의 해임 당시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형의 해임이 아버지의 뜻이었다는 것은 인정한 셈이다.
일단 아버지와 장남 사이의 관계가 급작스럽게 틀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양측의 불화설은 일본에서도 터져 나왔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지난 6월 14일 롯데그룹의 ‘형제싸움’을 보도하며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재산분할을 둘러싼 다툼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노여움을 사 해임으로 연결됐다는 설이 들린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신동주 전 부회장 해임의 한 원인으로 신격호 총괄회장과의 불화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앞서 일본 <산케이신문>은 올 1월 19일자 기사에서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 간에 재산 문제 등으로 갈등이 있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신격호 총괄회장을 소홀히 대했거나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고 보도했다.
아버지와 큰아들간의 재산 분할이나 갈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롯데가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실 일본롯데는 제과와 롯데리아 등 식품에 한정해서만 사업을 하다 보니 경쟁도 심하고 성장성도 제한됐다. 하지만 일본롯데는 대단한 부동산재벌이었다. 도쿄의 알짜배기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이렇게 번 돈으로 한국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 ‘껌’에서 벗어나 대단위 쇼핑몰 등 이른바 ‘돈 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결과 한국롯데는 식음료 등 일본롯데의 주력 사업 이외에 테마파크, 호텔, 백화점, 건설, 엔터테인먼트, 금융 등 문어발 확장을 거듭하게 된다. 또한 한국을 교두보로 중국, 베트남, 동남아 등의 세계시장으로 진출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롯데를 맡게 된 신동빈 부회장이 크게 부각된다. 그 이전만 해도 신동주 전 부회장의 장자 상속은 일종의 불문율로 여겨졌다. 롯데가 일본에서 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롯데를 기반으로 한국롯데를 키워보자는 것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한국롯데의 매출액이 약 83조 원인데 일본롯데는 5조 원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상당한 박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일본에서 ‘껌’ 팔아 돈을 모아놓았는데 그 돈을 아버지가 한국롯데에만 투자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은 자존심에도 상처를 받게 된다. 사교성이 있고 뚝심도 있는 동생이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추진력을 인정받은 반면 자신은 ‘은둔형’ 리더십으로 밖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는 데다 기존 것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며 동생과 비교를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
재계의 한 관계자는 “동주 전 부회장은 공과대학을, 동빈 회장은 경제학부를 졸업해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도 정 반대라고 한다. 아버지는 장남보다는 차남의 공격적 스타일이 롯데의 미래에 맞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어쨌건 카리스마와 포부에 있어서 형이 동생에게 밀린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동주 전 부회장이 동빈 회장에게 반격을 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만으로 신동빈 회장의 대관식이 완전하게 끝났다고 볼 수 없다. 신 회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롯데의 각종 해외사업이 주춤하고 있고, 제2롯데월드의 크고 작은 문제도 여전히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신동빈 회장이 극복한다면 진정한 후계자가 되겠지만 계속 흔들리게 되면 형이 ‘수성’을 무기로 전격 복귀할 수도 있다. 롯데가의 ‘두 형제의 난’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