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형제싸움 갈수록 부자대결
롯데그룹의 후계를 놓고 일본에서 ‘왕자의 난’을 벌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7월 29일 오후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을 통해 들어서는 모습. 일본행을 함께한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은 그보다 하루 먼저 귀국했다. 연합뉴스
일본롯데를 책임지고 있던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하루아침에 모든 직책에서 ‘쫓겨난’ 것은 지난해 12월 26일. 신 전 부회장은 이날 임시이사회를 통해 롯데 부회장, 롯데상사 부회장 겸 사장, 롯데아이스 이사 등 일본롯데 주요 계열사 임원직에서 해임된 것. 불과 열흘 남짓 후인 지난 1월 8일 일본 롯데홀딩스는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신동주 부회장을 이사직에서 해임하는 내용을 승인했다.
신 전 부회장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은 동생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다. 한국롯데를 맡고 있던 신 회장은 지난 7월 15일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이사회에서 이사회 참석자 전원 찬성으로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일본롯데마저 ‘접수’한 것이다. 신동빈 회장은 “이번 이사회 결정을 겸허하고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신격호 총괄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한국과 일본의 사업을 모두 책임지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한편 리더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며 한국과 일본의 롯데그룹을 모두 맡게 된 소감을 밝혔다.
이 같은 과정을 지켜본 재계는 한편으로 의아해했다.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의 경영구도 원칙 중 하나였던 ‘일본롯데는 신동주, 한국롯데는 신동빈’ 체제가 붕괴되고 신동빈 회장이 한일 롯데의 통합 맹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재계에서는 한일 롯데를 오가며 경영을 챙긴 신격호 회장의 ‘셔틀경영’을 장남이 아닌 차남 신동빈 회장이 이어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지난 7월 27일 오전 94세의 신격호 회장이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영자 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 신동인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직무대행 등 친족 5명이 따랐다. 신동빈 회장은 없었다. 신격호 회장 일행은 일본으로 향했다.
신격호 회장의 일본행은 신동주 전 부회장이 주도한 것이며 신 회장 집무실이 있는 호텔롯데는 물론 한국 롯데그룹이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 등 가족 간의 만남 정도로만 알고 있어 일본행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도착한 신격호 회장은 오후 4시쯤 일본 롯데홀딩스 사무실을 찾았다. 신 회장 옆에는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영자 이사장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신격호 회장은 자신을 제외하고 신동빈 회장을 비롯해 쓰쿠다 다카유키 대표이사 부회장 등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6명을 모두 해임했다. 신동빈 회장은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에 이름을 올린 지 불과 12일 만에 아버지 지시로 해임된 것. 신격호 회장은 신동주 전 부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으로 이사들의 이름을 가리키며 해임하라고 일본 롯데홀딩스 직원들에게 지시했다는 후문도 전해졌다.
신동빈 회장 측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신동빈 회장 등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6명은 신격호 회장의 이사 해임 결정이 정식 이사회를 거치지 않은 불법 결정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7월 28일 오전 일본 롯데홀딩스 긴급 이사회를 열어 신격호 총괄회장을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부회장에서 전격 해임했다. 해임당한 이사들이 자신들의 해임을 지시한 그룹의 창업주를 물러나게 한 것이다.
아버지가 해임됨으로써 경영권을 되찾으려는 신동주 전 부회장의 ‘왕자의 난’은 진압되는 듯했다. 하지만 롯데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다툼 양상이 일파만파 번지면서 아버지 신격호 회장을 가운데 두고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회장의 싸움이 점점 더 격화돼갔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지난 7월 30일 일본과 한국에서 잇달아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친 신격호 총괄회장이 일관되게 그 사람(신동빈 회장 등)을 추방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며 이번 일이 자신이 꾸민 ‘쿠데타’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동빈 회장 측이 중국 사업을 포함해 한국 롯데 실적을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누락하거나 거짓 보고해 분노를 샀고, 이에 신동빈 회장 등의 해임을 지시했지만 사임도 하지 않아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일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 등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6명을 해임하고, 신 전 부회장을 다시 일본 롯데홀딩스 사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담긴 신격호 회장의 서명이 된 지시서를 공개했다.
아버지 신격호 회장을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직에서 해임시킨 신동빈 한국 롯데그룹 회장(왼쪽)과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롯데호텔 건물. 임준선·박은숙 기자
반면 신동빈 회장은 “연로한 아버지(신격호 회장)를 하루에 두 번이나 비행기를 태워 한국과 일본을 오가게 하다니. 가족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분노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 신동주 전 부회장이 쇠약해진 아버지를 내세워 경영권을 되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롯데그룹은 신 전 부회장이 공개한 지시서에 대해 “신격호 회장의 판단력이 흐려진 상황에서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법적 효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형제간 공방이 격화되면 될수록 롯데그룹의 치부가 계속 공개되고 있어 대결 양상이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신격호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 롯데 오너 일가 입장에서는 괴로운 부분일 듯하다. 올해 94세 고령인 신격호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상설이 나돌았다. 롯데그룹은 그동안 신격호 회장이 여전히 그룹의 주요 사안을 직접 챙기는 등 왕성한 경영활동을 보여주고 있다며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번 싸움이 진행되면서 롯데그룹은 “신동주 전 부회장과 일부 친족들이 고령으로 판단이 어려운 총괄회장을 임의로 모시고 가 구두로 해임 발표를 유도했다”고 밝혔다. 지시서 작성과 관련해서도 “신 총괄회장이 판단이 흐려진 상황 속에서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롯데그룹이 공식 입장을 통해 그동안의 주장을 뒤집으며 신격호 회장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등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자인한 셈이다.
롯데그룹의 해외사업 부진, 그로 인한 신격호 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갈등 의혹도 불거졌다.
일부 언론에서는 롯데 내부 소식통의 말을 빌려 신격호 회장이 신동빈 회장을 불러 중국 사업에 왜 1조 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그러면서도 왜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7월 초부터는 신 회장과 신 회장 측근들을 만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은 “중국사업 투자는 5~6년 전부터 시작됐으며 시작 단계부터 신격호 회장의 보고와 지시에 따라 투자 방향과 규모가 결정돼 추진됐다”며 “신격호 회장은 매번 계열사 사업실적을 보고 받았고 보고가 누락되거나 거짓 보고가 있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결국 이번 사태의 핵심은 신격호 회장의 의중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느냐는 점이다. 앞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이사직에서 해임된 직후인 지난 1월 14일 신동빈 회장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의 해임에 대해 “회장님(신격호 총괄회장)이 하신 일이라 잘 모르겠다”며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알렸다.
그 후 지난 4월 신동주 전 부회장과 부인이 서울 롯데호텔 신관 34층 신격호 총괄회장 직무실 겸 거처 문 앞에서 열흘 넘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일명 ‘석고대죄’를 해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말도 전해졌다.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에 오른 것에 대해 신격호 회장이 격분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신격호 회장의 이번 일본행이 자발적인 동행이었는지 아니면 신동주 전 부회장과 친족들이 무리하게 모시고 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증폭하고 있다. 이번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신격호 회장이 해임 결정 이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자식 간 다툼이 불거진 직후인 지난 7월 28일 오후 10시 15분쯤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나 신동빈 회장은 동행하지 않았고, 장녀 신영자 이사장이 수행했다. 신격호 회장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공항을 빠져나갔다.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경영권 다툼은 임시 주주총회로 넘어가는 양상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주주총회를 열어 이사 교체를 추진, 동생 신동빈 회장에 대항할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지난 31일 밤 신격호 회장의 부친 제삿날을 계기로 롯데그룹 오너 일가의 전쟁이 화해모드로 갈지 모른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신동빈 회장이 끝내 불참함으로써 화해는 물 건너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롯데그룹은 31일 오후 “일단 오늘 귀국 일정은 취소됐고 주말에 돌아올지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어머니 시게미쓰 하쓰코 씨도 시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88세 고령의 몸을 이끌고 일본에서 건너온 터다.
신동빈 회장이 지금까지 할아버지 제사에 꼭 참석해왔으며 신격호 회장이 이 부분을 기특하게 생각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신동빈 회장의 제사 불참은 허투루 보아 넘길 대목이 아니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 대기업 인사는 “오너 일가 중 특히 현재 경영을 맡고 있는 총수가 가족행사에 혼자만 불참한다는 것은 대결 구도를 본격화한 것”이라며 “롯데 오너 일가의 지분 경쟁이 가속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은 평소에도 종교적·철학적 신념 때문에 제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며 제사에 반드시 참석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신동빈 회장이 조부 제사에도 불참하며 일본에 머무는 동안 한국에서는 신동빈 회장에게 불리한 내용과 증언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부친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한 신선호 일본 산사스식품 사장은 “(총괄회장이 차남에게) 회사를 탈취당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신동주가 (한일롯데 모두) 경영권 갖는 것에 대한 의견 한 번도 바뀐 적 없다”고 전했다. 신 사장은 신격호 회장의 동생이다. 신격호 회장의 뜻이 늘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에 있었다는 것.
지난 31일에는 또 신격호 회장의 이름과 직인이 찍힌 문서가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7월 17일자로 장남인 신동주를 한국롯데그룹의 회장으로 임명함”이라며 “차남인 신동빈을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승인한 사실이 없음”이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아울러 신격호 회장이 “쓰쿠다(쓰쿠다 다카유키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와 신동빈을 그만두게 했잖아”라며 “강제로 그만두게 해야지”라고 직접 말한 육성파일도 공개됐다.
그러나 롯데그룹은 신격호 회장의 직인이 찍힌 문서에 대해 “법적 효력도 없으며 진위도 가려지지 않았으므로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밝혔다. 육성 파일에 대해서는 “총괄회장님의 의중이 롯데 경영 전반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상법상 원칙에서 벗어난 의사결정까지 인정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신동빈 회장이 ‘한일 롯데 통합 맹주’로 교통정리가 끝난 줄 알았던 롯데그룹의 승계구도가 신동주 전 부회장의 ‘왕자의 난’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