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무승부=패’ 김성근 무언의 항의 최정을 마운드로…
2008년 9월 3일 잠실경기장에서 열린 두산과 한화의 경기에서 프로야구 사상 최장 이닝인 연장 18회 승부를 펼쳤다. 18회말 2사 주자만루에서 두산 김현수가 밀어내기 볼넷으로 경기를 끝내는 모습. 연합뉴스
시즌 내내 1위를 달렸던 삼성 선수들은 최근 NC가 2경기 차까지 따라붙었을 때,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무승부가 없고 NC는 2무가 있다. 사실상 1경기 차나 다름없으니 분발해야 한다”며 고삐를 조이곤 했다. 이렇게 시즌 내내 관심 밖의 숫자로 여겨지던 무승부가 시즌 막바지 살얼음판 순위 싸움에서는 순식간에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다. 한국 프로야구가 1982년 출범 이후 줄곧 ‘무승부’에 대한 딜레마와 싸워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무승부 계산방식의 변천
무승부를 총 경기 수에서 제외하는 현재의 승률 계산방식은 프로야구 창단 첫 해인 1982년부터 도입됐다. 일본 프로야구의 순위 결정방법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이 제도에도 맹점은 분명히 있다. 무승부수가 많은 팀이 승수가 많은 팀을 승률로 누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어서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1승 9무나 2승 8무인 팀이 9승 1패한 팀보다 승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KBO는 1987년부터 11년간 무승부에 0.5승을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승수 전체와 무승부 수에 0.5를 곱한 수를 더해 전체 경기 수로 나누는 방식이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는 듯하던 이 제도 역시 “연장전에서도 꼭 이기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무승부라도 따겠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하는 팀들이 많아졌다. 무승부에도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다시 기존의 승률제로 복귀한 까닭이다.
끊이지 않는 무승부 논쟁으로 인해 2003년과 2004년에는 아예 승률 대신 ‘다승제’를 적용했다. 말 그대로 그냥 승수가 많은 팀이 무조건 앞서는 것이다. 이 또한 “무승부의 처리방식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폐지됐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다시 고전적인 ‘무승부 제외’ 방식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2008년에는 일시적으로 무승부를 없애고 무제한 연장전, 일명 ‘끝장승부’를 도입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팀 성적에서 무승부가 사라진 해였다. 그러나 단 한 시즌을 치르는 사이에도 선수층이 얇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현장의 불만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2009년과 2010년에 도입됐던 ‘무승부=패’ 규정이다.
# 우승까지 바꾼 ‘무승부=패’
1무와 1패의 가치를 동일하게 판단하겠다는 ‘무승부=패’ 승률 계산방식은 세계 어느 리그에도 없는 한국 프로야구만의 로컬 룰이었다.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무승부 관련 규정 가운데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무제한 연장전을 1년 만에 없애는 대신, 승리에 대한 중요성은 똑같이 강조하겠다는 의미. 한 번 게임을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비겨도 패배나 다름없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문제는 이 제도가 실제로 2009년 정규시즌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아마 KBO 역시 새 규정이 우승팀까지 바꿔놓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각본 없는 드라마처럼 도입 첫 해부터 그렇게 됐다.
2009년 정규시즌 우승팀 KIA는 81승 48패 4무, 준우승팀 SK는 80승 47패 6무를 기록했다. 한국 프로야구가 2007년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일본식 승률 계산법(무승부를 총 경기 수에서 제외)을 적용하면, 승률 0.630의 SK가 0.628의 KIA를 앞선다. 우승팀이 바뀐다는 얘기다. 또 무승부에 0.5승의 가중치를 줬다면 양 팀의 승률은 정확히 0.624로 일치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즌부터 무승부가 패로 처리되면서 사실상 81승 52패가 된 KIA가 80승 53패의 SK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 SK-KIA전 해프닝
“이럴 바엔 ‘무승부=승리’가 차라리 낫다. ‘무승부=무승부’가 안 되면 서스펜디드게임으로 끝까지 승부를 가리거나 끝장 승부(무제한 연장전)를 되돌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정도다. 이 제도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2009년 6월 25일 SK 최정이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KIA와의 경기에서 연장 12회말에 투수로 나와 화제가 됐다. 연합뉴스
그러자 김 감독은 12회말에 상식을 뛰어 넘는 선수 교체를 했다. 마운드에 내야수 최정을 올리고, 1루수에 투수 윤길현을 기용했다. 또 2루수를 유격수와 3루수 사이에 놓고 1루와 2루 사이를 아예 비워 버리는 수비 시프트까지 가동했다. 결국 SK는 투수 최정이 던진 공을 포수 정상호가 뒤로 빠트리면서 5-6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최정은 패전투수가 됐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그 상황에 등판이 가능한 유일한 투수 윤길현이 어깨 통증을 호소해 할 수 없이 최정을 투수로 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야구계는 대부분 ‘무승부=패’ 제도에 대한 반란으로 해석했다. 어차피 이길 기회를 놓친 SK로서는 마지막 남은 한 이닝이라도 중요한 투수를 아끼고 싶었던 데다, 평소 이 제도의 불합리에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김 감독이 이때다 싶어 항의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날 SK가 KIA에게 내주다시피 한 1승은 역시 시즌 마지막 날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앞서 밝혔듯 KIA가 SK보다 딱 1승을 더해 정규시즌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다. 상대를 이기게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함께 지는 게 낫다는 이 제도의 어폐가 다시 한 번 고스란히 드러났다.
# ‘무승부의 자격’을 되찾은 무승부
사실 ‘무승부=패’ 제도는 연장전에서 느슨하게 승부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의도로 도입됐다. 그러나 사실 이 규정의 가장 큰 폐해는 동점 상황에서 강우콜드게임이 선언될 때 발생했다. 실제로 2009년 8월 24일 잠실 LG-두산전에서는 2-2로 맞선 5회 강우콜드게임으로 경기가 끝나 두 팀 모두 ‘패’를 기록하는 사례가 나왔다. 순위 싸움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양 팀 선수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졌다”며 탄식했다.
이쯤 되니 2010시즌을 앞두고 KBO 이사회가 ‘무승부=패’ 규정을 1년 더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오히려 더 논란이 일 정도였다. 각 구단 단장들이 참석하는 실행위원회와 각 구단 감독들이 모인 감독자 회의에서는 무승부를 아예 경기 수에서 없애는 원래의 승률제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사장단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2008년 새로운 규정(무제한 연장전)을 만들 때도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만들었다가 금세 바뀌었다. 제도의 실효성이나 부작용을 따지기 전에 또 다시 1년 만에 제도를 바꾸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제도 유지를 결정했다. 당연히 현장은 들고 일어났다. “감독자 회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결국 KBO는 2010시즌을 끝으로 ‘무승부=패’ 제도를 폐지했고, 2011년부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승률 계산방식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절충안을 찾은 셈이다. 물론 그동안 무승부에 대한 규정이 수년 간격으로 바뀌어 왔듯이, 앞으로도 무승부 계산방식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혹은 또 다시 메이저리그 식으로 끝장승부를 부활하자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다. 야구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는 승리와 패배가 갈려야 가장 스포츠답다는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지 않는 승부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 고민을 낳는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끝장승부의 추억 “징하다 징해” 1박 2일 혈투 지난 2008년은 어쩌면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시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승부 없이 일명 ‘끝장승부’를 펼친 한 해라서다. 2008년 6월 12일 목동에서 열린 KIA-히어로즈 경기에서 사상 첫 ‘1박 2일’ 게임을 연출했다. 따라서 2008년의 ‘무제한 연장전’ 도입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다만 현장에서는 선수들의 체력이 저하되고 부상 위험과 피로도가 높아진다는 이유로 시즌 내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선수층이 얇은 한국 프로야구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 때문에 한 시즌 만에 다시 시간제한 없이 연장 12회까지 치르는 방식으로 제도가 바뀌었고,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승패를 가려야 끝을 볼 수 있다는 끝장승부의 매력은 KBO리그 역사에 짧지만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일단 2008년 6월 12일 목동 KIA-히어로즈전에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날짜를 넘긴 ‘1박 2일’ 승부가 연출됐다. 12일 오후 6시 32분에 공식 개시된 게임은 13일 오전 0시 49분에 끝이 났다. 6회 도중 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됐던 55분의 시간을 제외했는데도 불구하고 순수 경기 시간이 5시간 22분이었을 정도다. 양 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야수 28명(각 팀 14명)이 모두 나왔고, KIA 투수 3명과 히어로즈 투수 8명이 투입됐다. 총 39명의 선수가 그라운드를 거친 셈이다. 홈팀인 히어로즈 구단은 캔맥주 200개를 급히 공수해 마지막까지 ‘역사의 현장’을 지킨 팬들에게 축하 겸 위로의 뜻을 전했고, 원정이라 미처 야식을 준비 못한 KIA 선수들은 냉장고 안의 음료수로 허기를 달래가며 경기를 뛰었다. 결국 승부는 연장 14회 말 1사 만루에서 히어로즈 강정호가 끝내기 좌전안타를 때리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히어로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처럼 기쁨을 만끽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해 9월 3일 잠실 한화-두산전에서는 급기야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18회 승부라는 역사가 기록됐다. 연장전이 15회까지 열렸던 시절에는 15회 경기도 가끔 나왔지만, 16회 이후에 경기가 진행된 것은 유일무이했다. 3일 6시 31분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경기는 양 팀이 모두 한 점도 뽑지 못한 무득점 상태로 끝도 없는 ‘0’의 행진이 이어졌다. 한화 7명, 두산 5명을 합쳐 모두 12명의 투수가 마운드를 밟았고, 한화 13명, 두산 14명, 야수 27명이 그라운드에 나섰다. 양 팀 모두 38명의 선수가 힘을 쏟아 부은 끝에 경기는 결국 또 다시 날을 넘겨 4일 오전 0시 22분에야 끝이 났다. 연장 18회말 2사 만루에서 두산 김현수가 한화 안영명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 힘겹게 귀중한 첫 점수이자 결승점을 뽑았는데, 김현수에게는 이날의 9번째 타석이었다. 총 5시간 51분으로 역대 최장시간 경기. 이 기록은 이듬해 5월 21일 광주 LG-KIA전(5시간 58분)에서 깨졌다. 물론 끝장승부가 보편화된 메이저리그에서 이 정도는 약과다. 한국이 무제한 연장전을 치르던 바로 그 해, 2008년 4월 18일(한국시간) 샌디에이고와 콜로라도는 펫코파크에서 무려 연장 22회까지 가는 혈전을 벌였다. 한 경기에 6시간 16분이 소요됐다. 콜로라도의 트로이 툴로위츠키는 연장 22회초에 귀중한 결승타를 때려내 이날의 영웅이 됐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