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포기하면 제2의 이라크 된다”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비핵화와 관련한 북한의 속내에 관심이 집중된다. 사진은 2007년 2월 8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 3단계 전체회의. 연합뉴스
첫번째 문건은 지난 2005년 5월에 작성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당 내 국가안전보위부 및 국방위원회 소속 책임간부급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및 위원들과 부장 및 제1부부장급 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힌 담화다. 이 문건은 절대로 단순한 회의록이 아니다.
무엇보다 민감한 건 담화 시기다. 2005년 2월 북한은 기존의 6자회담 협상 틀을 완벽하게 깨부순 뒤, 자체적으로 핵보유국을 선언했던 시점이었다. 이 회의 시점은 그로부터 정확히 3개월 뒤다. 당시 김정일은 6자회담과 북한이 개발 중인 전략 핵무기프로그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국제사회에서 무리수를 두더라도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담화를 통해 속내를 자세히 밝혔다.
당시 6자 회담에 대한 김정일의 주요 발언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급선무로 해결할 과업의 하나가 6자회담의 성과적 보장입니다. 6자회담이 개최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6자회담에 참가하는 여러 나라 대표들과 주변 국가들은 우리가 자제하고 회담에 성의 있게 참가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담에서 남들의 충고를 듣고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미국과 열강들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맙니다. 제2의 이라크처럼 될 수 있습니다. 각성해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입장을 명백히 하여야 합니다. 강대국들과 맞서 있는 조건에서 조금이라도 양보한다면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6자회담 틀은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측면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2007년 9월 30일 열린 6자회담. 연합뉴스
김정일은 (북한 입장에선) 절대로 상상하기 싫은 ‘무장 해제’라는 섬뜩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북한이 제2의 이라크가 될 수 있다는 과거 전례까지 들먹이면서 말이다. 결코 6자회담에서 호락호락하게 참가국들에 끌려 다닐 생각이 전혀 없음을 명확히 했다. 김정일이 말하는 ‘입장’에 대해선 다음 대목에 이어진다.
“주체를 철저히 세워 우리의 주권을 당당하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기존 입장은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의 회담에서도 조선반도의 평화와 핵에네르기(핵에너지) 문제를 중점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핵을 먼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다가는 알몸이 될 수 있습니다. 회담에서 우리의 성의를 끝까지 보이고 해결 안 되는 문제는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김정일은 이미 주변국들과 협상 테이블을 꾸리며 논의를 이어갔던 이 시기에도 (북한 핵심지도층으로) 내부적으로는 ‘핵포기 불가론’을 명확하게 한 상황이었다. 핵보유국 인정을 이미 염두에 둔 상황이었고, 나머지 협상국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책임론은 북한과 무관하다고 선을 딱 그은 셈이었다.
이미 현재는 상당 수준에 올라온 핵개발 관련 전략무기들에 대한 중요성도 이 시기 부쩍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정일이 직접 한국의 전략무기 현대화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대목이다.
“주변 국가들은 모두 앞으로 전진하는데 우리만 뒤떨어져 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남조선 군대도 지금 최첨단 전술작전장비들이 널리 보급되어 수준이 아주 높은 단계에 올라섰습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약간의 긴장을 늦추어도 안 됩니다. 몇 년 안에 따라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핵탄두 탑재와 직결되는 전략무기, 이른바 미사일과 잠수함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이어진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첨단 무장 장비들을 더 개발하고 의미 있는 군사 장비들의 현대화를 다그쳐야 하겠습니다. 올해 생산된 미사일의 성능이 괜찮습니다. 92호 공장에서 만든 미사일이 더 좋습니다. 앞으로 지상 대 지상 미사일과 지상 대 해상 미사일을 중점으로 틀어쥐고 현대화하여야 하겠습니다… 해군 무력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다목적 잠수정들을 대대적으로 개발 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꼭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연재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실제 북한은 지난 10년 동안 전략 미사일과 잠수함, 특히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분야에서 적지 않은 발전을 이뤘다. 이는 북한 핵개발 관련 전략무기 프로그램 중에서도 핵심에 해당한다. 김정일은 이 자리에서 앞서의 것과 관련한 ‘내부 행정적 시스템’에 대해서도 적극 강조했다.
“제2경제위원회(북한의 군수경제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위원회. 일반경제는 제1경제위원회가 담당)에서는 군수품 생산에 필요한 자재, 설비들을 해당 공장들에 무조건 보장하고 국방위원회에서 내린 명령을 무조건 제때에 관철하여야 하겠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자회담과 관련해 ‘핵포기 불가론’을 명확히 밝혔다. 2005년 5월 김 국방위원장 담화 내용을 기록한 문건.
북한은 이후 2005년 7~8월에 있었던 6자회담 4차 회의와 그해 11월에 있었던 5차 회의를 통해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핵시설 가동 중지 및 비핵화에 동의했다. 2008년 6월엔 영변 냉각탑 파괴라는 국제적 이벤트도 실행했지만, 결국 다시 협상의 틀을 깨며 시설 복구 및 2차 핵실험(2009년 5월)을 감행한다. 기존의 핵 포기 불가론은 여전히 유효했으며, 6자회담의 틀은 이로써 깨지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 형국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와중에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었다. 국제사회는 6자회담과 관련해 그 다음 세대의 선택에 주목했다.
혹자는 ‘김정은의 심중이 아버지의 그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기대를 하기도 한다. 당시 이 문건이 작성된 것은 꼭 10년 전의 일이다. 물론 시대도 꽤나 변했다. 주변국들의 정세와 협상 틀에 있어서의 포지션도 적지 않은 변화가 감지된다. 다시금 6자회담 재개가 이번 한중일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 김정은의 심중이 주목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6자회담에서 북한의 협상 틀은 큰 폭에서 변하지 않았다. 필자가 공개하는 두 번째 문건의 일부 내용은 지난 2012년 5월에 작성된 것이며, 비슷한 시기 필자가 입수한 것이다. 해당 문건 역시 앞서의 첫 번째 문건과 같이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한 내부 회의에서 김정은이 밝힌 담화다. 보다 자세한 회의 주제와 참석인원들에 대한 정보는 보안을 위해 밝히지 못한다. 관련 내용은 간단하다.
“고위급 회의에서 우리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는 경우…(특히) 6자회담이 앞으로 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주변국들은 6자회담에 참가하길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회담에서 남들의 충고만 듣고 그대로 한다면, 제2의 이라크가 될 수 있습니다. 각성해야 합니다. 대국들과 맞서 있는 조건에서 조금이라도 양보한다면,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쯤하면 독자들은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 다음 대목은 이러하다. “이것이 김정일 동지의 유훈입니다!”
그렇다. 김정은은 6자회담 및 핵전략전술에 대한 북한의 입장에 관하여 정확히 7년 전, 아버지 김정일이 회의에서 밝힌 담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북한은 김정일의 유훈에 따라 협상 방침을 세울 것이고, 그 핵심은 ‘핵 포기 불가론’임에 틀림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실제 전략무기개발 프로그램의 발전이 과거 당시와 비교해 월등해졌다는 점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 필자는 6자회담에 대한 최고지도자들의 담화 문건을 통해 북한의 핵을 포함한 전략무기 활용전략의 핵심에 대한 ‘개론’을 밝혔다. 다음 연재를 통해 더 자세한 실체를 파헤쳐볼 계획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북한 핵개발 시작 비화 소련의 붕괴가 절호의 기회로… 북한 정권이 핵개발을 본격화하던 시점을 두고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선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소련의 핵개발 당시부터 깊은 관심을 두었던 당시 김일성 주석의 머릿속을 그 시작으로 둔다면, 북한은 체제성립 직후부터 핵개발을 계획했다고까지 볼 수 있다. 하지만 급진적으로 개발프로그램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80년대 냉전이 무너지기 직전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포한 시점 이후이다. 또 이를 뒷받침한 당사자국들도 결국엔 구소련(현재 러시아)과 중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명확한 것은 1980년대 후반 김정일이 핵개발에 본격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핵개발 프로세스를 놓고 본다면, 소련의 붕괴는 곧 북한에게 있어선 절대적 기회였다. 왜 그럴까. 그 배경은 이러하다. 1988~90년 사이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소련의 일부 위성국들은 그동안 개발해 놓은 전략 핵무기들을 일체 반납하고 완전 해체했다. 그중 대표적인 나라가 당시 소련 위성국 중 규모면에서 핵심국가로 꼽히는 카자흐스탄이다. 카자흐스탄은 1990년까지 이 작업을 진행했다. 북한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일부 군부 내 관련 전문가들과 정보관련 공작원들에게 이른바 ‘특별임무’를 하달하고 카자흐스탄에 급파한 것이다. 그 임무라는 것이 현재의 북한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카자흐스탄에선 최소한 4~5개가량의 핵배낭이 사라졌다. 핵 전략무기를 도난당한 것이다. 물론 그 일을 행한 사람은 앞서 임무를 받고 급파한 북한 인사들이었다. 이렇게 북한으로 넘어온 핵 배낭은 향후 핵개발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게 된다. 북한은 이를 바탕으로 철저히 모방 설계에 나선다. 향후 서술할 미사일 설계국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성립된다. 한편으론 당시 소련이 무너질 때, 쏟아져 나온 공산주의 성향의 핵과학자들 일부도 북한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러시아 내에서만 이러한 핵과학자들이 7000명 정도나 됐다. 체제 붕괴에 불만을 품은 핵 및 미사일 개발 관련 과학기술자들에게 ‘북한’이라는 소위 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이자 명분을 챙기고 있는 집단은 매력적이었다. 맘속 깊이 핵개발 욕구를 가진 이러한 과학자들은 북한의 스카웃 전략에 그대로 먹혀 들었다. 북한은 이 시기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최소한 구소련 핵 및 미사일 관련 과학기술자들 20여 명이 북한 제2자연과학원 내에서 북한 핵 및 전략미사일 개발에 참여했다. [걸] |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