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한파 곧 온다” 겨울잠 채비
서울 강남 재건축 아파트값이 들썩이는 등 주택경기가 활황세인 가운데 대형 건설사들은 오히려 주택사업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한 부동산 시세 게시물들.
“2000년대 사놓은 택지가 많은데 그동안 개발도 못하고 손실이 적지 않았다. 경기 좋을 때 빨리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문제 터지기 전에 난 그만둔다.”
부동산 경기 과열과 건설사들의 분양 공세에 대해 한 건설사 임원이 사석에서 한 말이다. 요즘 부동산 경기를 대하는 건설사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급 순위 1, 2위인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주택사업 부문을 축소하는 한편 신규 사업 수주를 중단하고 있다.
삼성물산의 경우 지난해 12월 조직개편을 통해 기존의 주택사업부를 빌딩사업부에 흡수 통합시키는 등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지난 2012년에는 15년 전 ‘래미안 신화’를 쓴 부사장 이하 12명의 임원들을 한 번에 내보냈다. 이 일은 ‘12·12 사태’로 불리며 업계에 큰 충격을 줬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주택사업 부문 정규직 직원들도 1300명에서 900명으로 감축했다.
삼성물산이 지난 4년 동안 서울 지역에서 새로 수주한 재건축·재개발 아파트도 3건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지는 등 신규 수주에도 소극적이다. 일례로 서울 잠원동의 신반포 6차 아파트의 경우 재건축 조합이 시공사로 삼성물산을 선정했음에도 이 사업을 GS건설에 넘겨줬다. 삼성물산은 표면적으로 수주 잔고가 13조 원이나 되기 때문에 굳이 새 사업을 수주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 발로 굴러들어온 사업을 일거에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지난해 토지 평가액은 3098억 원에 그쳐 전년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주택 분양을 위한 신규 택지 매입에 소극적이었다는 뜻이다.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삼성이 이르면 2017년께 주택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파다하다”고 전했다.
현대건설도 주택사업 철수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대건설은 서울 반포동의 삼호가든맨션 3차 재건축을 수주하기 위해 새로운 고급 아파트 브랜드를 선보이는 등 일견 적극적이다. 그러나 올해 새로 공급할 물량은 총 1만 7000가구로 대우건설(3만 1580가구), GS건설(2만 5139가구), 대림산업(2만 4513가구)에 한참 못 미친다. 신규 발주 사업 수주에도 소극적이다.
이를 두고 현대건설이 현대엔지니어링을 흡수·합병하면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면 개편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은 각 사업부문을 슬림화함으로써 새로운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춘 건설사로 재탄생할 수 있다”며 “이 과정에서 현대건설이 주택사업을 완전히 접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메이저 건설사들이 이처럼 주택시장에서 하나둘 떠나는 것은 내년 이후 주택경기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건설산업연구원이 국내 건설사 최고경영자 6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38.8%가 올해를 끝으로 건설 경기가 다시 주춤할 것이라고 답했다. 2016년까지 회복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한 응답자는 32.8%였으며, 2017년까지 회복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응답자는 20.9%였다. 건설사 CEO의 92.5%가 최근의 건설 경기 회복은 3년 뒤에는 끝날 것이라고 예측한 셈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정부가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해 워낙 강하게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시장이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다”면서도 “다만 주택사업 개선은 짧게는 올해, 길게 봐도 현 정부 집권 기간까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2014~2015년에 걸쳐 부동산 경기가 반짝 상승하면서 거래가 활발했던 점이 오히려 수요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5년 1~10월 누적 주택매매거래량은 100만 8000건으로, 전년 동기대비 22.5% 급증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2014년(100만 5000건)부터 2015년 10월까지 22개월 동안의 거래량은 201만 건. 전국 주택가구수 1870만 5000가구(2015년 기준, 추계치)의 10.7%가 최근 2년 동안 거래된 셈이다.
최근 주택가격이 급등한 점도 수요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5년 10월의 전국주택은 지난해 말에 비해 3.04%, 전년 동기에 비해 3.36% 각각 상승했다. 저금리 기조로 시장에 많은 돈이 풀리고, 신도시와 재건축 단지의 가격 상승이 이어지면서 전국 분양가가 동반 상승한 것으로 풀이된다.
2015년 6월 주택가격을 100으로 봤을 때, 2013년 8월 가격지수는 95.9, 2014년 8월 가격지수는 97.5다. 서울지역의 평균 주택매매가는 4억 6000만 원대, 수도권은 3억 3000만 원대이며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다. 전국 주택의 평균 분양가는 3.3㎡당 867만 원(2015년 9월 기준)으로 2014년 1월의 813만 원에 비해 6.6% 상승했고, 수도권은 재건축 확대로 2015년 1월 기준 3.3㎡당 1369만 원까지 치솟았다.
공급과잉과 수요부진이 가시화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대량 미분양 사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 신규 주택 인허가는 48만 호, 분양(승인) 34만 호, 준공 43만 호 등을 각각 기록할 전망이다. 2015년 인허가 실적 71만 호(예상치)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일부 지역의 공급 물량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다. 건설산업연구원은 2016년 물량이 현재 예측 수준만큼 이뤄진다면 하반기 들어 공급과잉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고 점쳤다.
이런 가운데 유동성 축소와 거시경제 불안, 베이비부머의 은퇴 등이 맞물리면 부동산경기가 경색될 우려도 적지 않다. 건설사들 사이에선 짓고 보자는 심리가 만연한데 이를 시장에서 언제까지 소화해 줄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김서광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