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한 권도 없고 ‘안보 관광객’만 오가
상암동에 거주하는 김 아무개 씨는 거주지 인근에 있는 박정희 기념·도서관을 열람 목적으로 방문했지만 책을 한 권도 발견하지 못해 헛걸음을 쳤다며 불만을 내비쳤다. 김 씨는 “주변에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생겼지만 방문하는 주민은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다. 간혹 군인들이 안보현장답사 명분으로 방문하고 50대 이상 노인 단체들만 들락날락한다”며 “주민들을 위한 시설이 아닌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로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의 건물 전방에 십수 개의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어 멀리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대지면적 14만 8930㎡의 넓은 부지에 지어진 기념·도서관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조국 근대화의 영웅’과 ‘2017년은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 등의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정작 건물 안에 들어가면 전시실은 있지만 열람실은 찾아볼 수 없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기자가 직접 방문한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역사적 배경과 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화정책 등 업적 위주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선에서 온 한 여성단체협의회 20여 명의 일행이 전시관을 돌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해설가의 설명을 들었다. 안내를 하는 이들은 사단법인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 직원들이었다. 기념사업회는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운영주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해당 도서관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며 상암동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서울시와 박정희대통령 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인 1999년 당시 기념관 건립비용으로 202억 원의 국고보조금이 책정돼 착공했다.
원래 장소는 상암동이 아니고 용산이었다. 기념재단 관계자는 “당시 기념사업회장이었던 신현확 전 총리가 기념도서관 사업을 담당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군이셨고 용산에 미군이 철수하면 공간이 생길 것으로 판단해 국방부가 있는 용산에 지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때 공사가 중단되고 국고보조금 지원도 무산위기에 처해졌다. 공사는 계속해서 미뤄졌고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상암동으로 장소가 확정돼 다시 공사가 시작됐다. 그렇게 착공 20여 년 만인 2012년에 개관했다.
개관식에는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 “기념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안했고 국민의 정성이 모여 완성됐다”며 “여기에는 ‘국민 통합’이라는 소중한 정신이 담겨 있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역사적 사업을 완성시켜준 국민께 감사드린다”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자리한 마포구가 지역구인 정청래 새정치연합 의원은 지난 총선 때부터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폐지 주장을 공식 제기해 왔다. 정 의원은 즉시 폐관을 주장하며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을 폐쇄하고 어린이도서관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다.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은 착공 이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도서관은 준비 중인 실정이다.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안내도에는 1층 기획전시 및 전시실이 있었고 2층에는 어린이 열람실, 일반열람실, 3층은 특별자료열람실, 전자자료코너라고 안내돼 있다. 그러나 정작 건물 안에 들어가면 전시실은 볼 수 있지만 열람실은 찾아볼 수 없다. 이로 인해 열람실 이용을 위해 이곳을 찾은 주민들은 안내표지판만 보고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전시실.
도서 대출과 검색시스템도 전혀 구비돼 있지 않고 있는 상태라 기념재단 측이 도서관 개관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기념재단 관계자는 “아직 도서관 개관은 준비 중이다. 설립 당시 모금했던 성금에 대한 이자로 기념도서관을 운영 중인데 저금리로 재정이 부족해 도서관을 짓는 데 어려움이 있다. 도서관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기념도서관으로 불리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며 “다만 공공도서관의 성격보다는 박정희 대통령을 기념하는 도서 위주로 구성될 것이다. 재단에서 만든 기념도서관의 특성상 일반 시민에 공개되는 공공도서관의 성격을 띠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264㎡ 이상의 사립 공공 도서관은 도서관법에 따라 60석 이상의 열람석과 3000권 이상의 기본 장서, 300권 이상의 연간증서와 사서 등을 갖춰야 한다.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은 공공도서관으로 등록하지 않고 사립도서관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사립도서관은 관할 지자체에서 운영 지원 및 관리 책임이 없으며 도서관법에 따른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제재할 수 없다.
서울시에 따르면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은 공공도서관으로 운영하겠다는 전제 하에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시유지에 지어졌고 지금까지 무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기념재단으로부터 시설 일체를 기부채납 받기로 했는데 재단 측에서 차라리 부지를 사겠다고 말해 내부적으로는 매각을 결정했지만 시민단체와 야권 등의 반대가 있어 지체되고 있다”며 “2002년부터 지금까지 제한 없이 무상으로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에서는 매각이 진행되면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사유화돼 친일, 독재가 미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한편 최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를 기념하는 김영삼 대통령 기념도서관도 YS 사저 인근 상도동에 착공했고 내년 3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바로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 건립이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지하 1층부터 2층까지는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담은 기념관으로 꾸미고, 나머지 공간은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이 될 예정으로 현재 내부 공사 중이다. 도서관에는 정치, 인문, 사회과학 분야 서적 1만여 권을 배치 할 계획이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