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여 표류 끝날까? 뚜껑은 열어봐야...
정부가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과 우면동 일대 ‘R&D 집적단지 조성’ 계획을 밝히면서 파이시티(옛 화물터미널) 부지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지도 하단에 위치한 파이시티 부지가 눈에 띈다. 지도는 정부 자료 일부 발췌.
지난 17일 정부는 제9차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열고 투자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날 대책 가운데 ‘양재·우면동 기업 R&D 집적단지 조성’ 계획이 중점 추진 과제로 꼽혔다.
정부는 현황 보고에서 “서울 우면동 소재 기업 A와 B의 경우 9000억 원 이상의 R&D 시설 증설 계획이 있으나 입지 특성에 따른 제약으로 증설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양재IC 인근 R&D 시설이 들어설 대규모 부지가 존재하나 도시계획시설(유통업무설비)로 지정돼 개발 수준이 미약하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정부가 기업 R&D 집적단지 조성 부지로 지목한 양재IC 일대는 개발이 제한된 자연녹지, 제2종 일반주거지역이 대부분이다.
정부는 또 “현재 상당수 시설의 용적률은 100% 이하”라며 “최대 용적률은 400%지만 유통·물류 관련 시설 등으로 분야가 한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는 양재IC 일대를 ‘R&D 특구’로 지정해 용적률 완화 등 규제 특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용적률이 완화되면 더 많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투자자 유치에 용이하다.
정부 발표와 함께 부동산 시장의 눈길은 파이시티 부지(9만 6000㎡)에 쏠린다. 정부가 직접 “3조 원의 투자 창출이 예상된다”고 한 만큼 중단된 개발이 재개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싹튼 것이다. 파이시티 부지는 현재 매각주간사인 무궁화신탁, 우리은행 등에 의해 매물로 나온 상태다.
물론 실제 개발이 이뤄지기까지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비교적 높은 가격과 인허가 관련 리스크 등은 부지 매각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지난 22일 9차 공매에 나온 파이시티 부지는 입찰신청자가 없어 최종 유찰됐다.
지난 26일 조항진 무궁화신탁 팀장은 “최저 입찰가 4525억 원은 아직 그대로지만 매수자가 없다”며 “R&D 단지 개발에 따른 구체적인 일정과 세부안이 나와야 시장이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의 수의계약 가능성에 대해선 “아직 접촉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앞서 서울시는 정부안과는 별개로 양재·우면 일대를 R&D 지역특구로 지정해 세제 혜택 등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를 위한 연구 용역이 진행 중이며, 오는 4월에는 일대 개발 방안이 담긴 가이드라인이 공개될 예정이다.
‘큰 그림’을 서울시가 그리면 다음 바통은 서초구청이 물려받는다. 지역특구 지정 신청 권한은 서초구청장에게 있다. 이덕행 서초구청 소통담당관은 지난 24일 “서울시가 용적률 등을 결정하면 서초구청이 특구지정 신청을 중소기업청에 할 것”이라며 “개발을 어떻게 할지는 개별 기업들이 판단해야 하고, 인근 주민들과 공청회를 여는 등 남은 절차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파이시티 부지에 대형 R&D 시설이 건립될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기류가 강하다. 최근 R&D 시설 투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 현대자동차는 본사 부지에 건립을 검토하고 있어 입주 가능성이 낮다. 또 파이시티 부지는 연구단지가 아닌 유통단지로 시장성을 평가받았기 때문에 R&D 시설 개발이 이뤄질 경우 부동산 가격이 내려갈 수 있다.
복합유통센터 파이시티가 들어서기로 돼 있던 서울 서초구 양재동 화물터미널 용지 전경. 일요신문DB
당초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유통단지 개발로 관심을 모은 파이시티 부지는 지난 2004년 시행사 파이시티가 토지를 매입한 뒤 2006년께 개발이 시작됐다. 무려 2조 4000억 원이 투입된 이 사업은 2010년께 석연찮은 이유로 개발이 중단됐다. 인허가 지연에 따른 자금난(PF대출)과 권력형 스캔들이 알려진 원인이지만 일각에선 이명박(MB) 정부 차원의 사업권 강탈 의혹을 제기한다.
실제 채권단 가운데 MB 정부와 가까웠던 한 금융사는 파이시티 부지에 전산센터를 건립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당시 양재동 개발 시공사로 선정된 C 사 주도로 전산센터 건립이 추진됐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관업무에 밝은 한 인사는 “사정기관 전·현직 고위 간부들이 파이시티 사업에 투자했다는 의혹부터 실세들 개입설까지 밝혀지지 않은 비화가 많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사연’ 많은 땅인 파이시티 부지는 시행사 파이시티가 2011년 1월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주인을 잃었다.
‘금싸라기’ 땅으로 주목받던 파이시티 부지는 개발 사업이 좌초되면서 수차례 공매에 나왔다. 최초 공매가 9864억 원에서 입찰가가 반토막이 났지만 번번이 인수자를 찾는 데 실패했다. 신세계백화점 등이 컨소시엄(STS개발)을 구성해 관심을 보였지만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STS개발은 지난 9차 공매 때도 유력 입찰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입찰을 하지 않으면서 채권단의 애를 태웠다.
채권단인 우리은행은 파이시티가 포함된 투자 상품을 파는 과정에서 불완전판매를 해 투자자들과 공방을 벌였다. 이상선 우리은행피해자모임 회장은 지난 23일 “우리은행과 합의를 봤고 원금에 대한 피해 보상이 일정 부분 이뤄졌다”고 밝혔다.
남은 피해자가 구제를 받는 동안 파이시티 부지에 대한 건축허가는 취소됐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파이시티 사건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조 원 규모로 알려진 복잡한 채권·채무 관계와 민·형사상 소송 기록만이 남았다.
정부는 파이시티 부지를 포함한 양재IC 일대 개발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원해 2017년부터 사업이 추진되도록 할 방침이다. 개발이 진행되면 파이시티 사건의 상흔은 땅 밑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 돈과 권력이 물고물린 파이시티 부지의 주인은 누가 될지 관심이 쏠린다.
한편 파이시티 사건은 파이시티 사업 인·허가 청탁 명목으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 강철원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이 이정배 전 파이시티 대표와 브로커 이동율 씨로부터 수억 원의 금품을 수수한 사건이다.
그 결과 최 전 위원장은 2012년 11월 1심에서 징역 2년 6월에 추징금 6억 원을 선고받고 이듬해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박 전 차관은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1억 9400만 원을 확정 판결 받았다. 강 전 실장에게는 징역 10월에 추징금 3000만 원이 최종 선고됐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