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벨트’ 타고 ‘개헌’으로 간다
▲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정계개편의 닻을 올린 고건 전 총리. 그가 구상하는 신당이 과연 정치권의 틀을 바꿀까, 아니면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까. | ||
정치권에서는 고 전 총리의 성향을 고려해볼 때 이번 신당 창당 선언은 상당히 파격적이라고 평한다. 고 전 총리가 그동안 여야 의원들을 두루 접촉하며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결과가 이번 창당 선언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고 전 총리는 자신이 접촉했던 의원들에게 “이미 40여 명의 현역 의원들이 신당 아래 모일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앞으로 고 전 총리는 그동안 쌓아왔던 여야 의원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창당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물론 비정치인 영입이 우선 순위라고 ‘연막’을 피우지만 국회 교섭단체만 만들어도 정치권의 새로운 정파로 우뚝 설 수 있기 때문에 현역 의원 영입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는 전언이다. 고건 신당, 그 깃발이 과연 얼마나 펄럭일지 미리 들여다봤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좀처럼 건너지 않던’ 고건 전 총리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정치권에서는 그의 이례적인 ‘신당 창당’ 행보에 대한 배경을 두고 말들이 많다. 사실 고 전 총리는 올 연말까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고 전 총리는 기존 정당으로 ‘편입’은 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신당을 만들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정치적 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창당 시기는 올 연말쯤으로 예상한다. 고 전 총리는 자신의 지분으로 여야의 보수세력을 결집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창당 때까지 계속 지지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그의 인기 기반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박근혜 대표나 이명박 서울시장처럼 확실한 지지기반이 있는 것이 아닌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당의 파괴력도 크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진단이 아직 틀린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신당 창당’ 시기에 있어서는 정치권이 허를 찔린 셈이 됐다. 사실 그동안 고 전 총리는 여당의 대권주자들이 하나둘씩 명멸해간 뒤 그 대안이 없을 때 깜짝 선언을 할 것이라고 예상돼왔다. 하지만 고 전 총리는 5·31 지방선거가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지난 6월 초 전격적인 ‘국민연대’ 창설을 선언했다.
그는 이 조직을 통해 앞으로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의 폭넓은 연대와 통합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정치인 전문가 그룹의 영입을 최우선 순위로 두겠다고도 밝혔다. 기존 정치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기존 신당의 창당 개념과는 다른 것이 될 것이다. ‘국민참여 신당’이라고 보는 게 맞다. 프로축구의 시민구단처럼 앞으로 국민들로부터 창당 자금을 모아 결사체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도 모색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창당 공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실험을 해볼 계획인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고 전 총리 측은 앞으로 젊은 비정치인 전문가그룹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울 방침이다. 그들과 함께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의 폭넓은 연대와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간다는 구상이다. 또한 사회 각 분야의 일반 국민을 중심으로 시민운동 성격의 ‘국민연대’ 모임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다. 고 전 총리는 이 모임이 정치적 결사체(신당)로 발전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며 신당 창당 추진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렇다면 고 전 총리는 왜 이렇게 전격적으로 ‘신당 창당’ 결행을 한 것일까.
먼저 고 전 총리와 그동안 계속 교감을 나눠온 한나라당 한 초선 의원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그동안 고 전 총리는 한나라당 내의 보수성향을 가진 경기고·서울대 동문들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교감을 나누어왔다. 그리고 열린우리당·민주당·국민중심당 의원들과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일주일에 3~4명씩은 꼭 만난 것으로 안다. 고 전 총리가 정치권의 예상보다 신당 창당을 앞당기게 된 것은 그동안 여야 정치인들과의 교감 작업이 상당히 진척돼 자신감이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지방선거 뒤 비틀거리는 여당의 모습을 보고 ‘이제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열린우리당의 대참패가 기정사실화된 선거 직전에 “고 전 총리는 지금 화장실에서 웃고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열린우리당 참패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고 전 총리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손 교수의 분석대로 열린우리당은 지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계 개편을 주도할 동력마저 상실했다. 고 전 총리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열린우리당을 접수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박근혜 대표의 피습 사건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고 전 총리는 그동안 대권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꾸준히 수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피습 사건 뒤 몇몇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2, 3위로 떨어져버렸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한번 뒤집힌 지지율을 다시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일각에선 그의 신당 행보를 박 대표 피습 사건에 대한 일종의 ‘물타기’이자 박 대표에게 빼앗긴 대권주자 1위 자리를 되찾기 위한 승부수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 전 총리는 노무현식 ‘깜짝쇼’로 지방선거 뒤 자칫 잃어버리기 쉬웠던 정계개편의 선취권을 쥘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고건 신당’의 파괴력은 과연 얼마나 될까.
먼저 고 전 총리와 교감을 나누어온 한나라당 한 의원은 “고 전 총리는 그동안 신당 창당을 두고 좌고우면하다가 최근 창당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의 최측근은 ‘지금 똬리를 틀어놔야 열린우리당이든 민주당이든 올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더라. 고 전 총리는 여야의 보수성향 의원들 10여 명만 있으면 당이 된다고 믿고 있다. 민주당 등과 당 대 당 통합도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하면서 “앞으로 고건 중심의 ‘서부벨트론’(충청+호남)을 눈여겨 봐야 한다. 고 전 총리가 ‘앞으로 여야 의원 40명 정도는 내게로 올 것이다’라고 공언하더라”고 밝혔다.
고 전 총리는 최대 40명의 현역 의원을 중심으로 신당을 창당할 계획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고건 신당이 한나라당의 외부 정계개편을 유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의 의원은 “한나라당도 정계개편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지금 한나라당이 잘 나가고 있지만 고 전 총리에게 매력을 느끼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다. 그들이 움직인다면 한나라당도 정계개편의 회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도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운 정당”이라고 밝혔다.
고 전 총리가 현역 의원 상당수를 확보한 제3세력으로 부상할 경우 다른 정당과의 합종연횡을 통해 ‘개헌론’을 적극 추진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고 전 총리가 여야 정파를 가리지 않고 내각제를 고리로 한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차피 다음 정권에서 한 사람이 권력을 독식하는 구조는 힘들 것이다. ‘권력의 컨소시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 전 총리는 이 부분에 대해 의원들과 충분히 교감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고 전 총리의 이번 새 정치 결사체 결성 발표는 내각제를 고리로 한 정계개편의 서곡으로 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고 전 총리의 ‘신당 창당’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고건 신당이) 앞으로 열린우리당 안팎의 고 전 총리 지지세력을 흡입해 정치권의 틀을 뒤바꾸는 동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의원도 있다. 하지만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고 전 총리의 세력은 지난 대선 때 정몽준 후보의 세보다 약할 것이다. 당시 정 후보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고 전 총리는 그런 것이 없다. 그는 지금껏 자기 몸을 던져 뭔가를 이뤄낸 적이 없다”고 꼬집고 있다. 고 전 총리의 움직임이 실제로 여야 정치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당의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고 전 총리 견제 움직임이 나오고 있는 점도 고 전 총리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나라당도 달갑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당직자는 “열린우리당 참패 직후 신당 창당을 가시화한 것은 다분히 기회주의적 처사다. 한나라당이 이번 창당으로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협력 없이는 고 전 총리의 ‘대권플랜’ 가동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민주노동당은 “고 전 총리가 지금까지 국민에게 보여준 것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가 만들려는 정당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지역주의 연합 정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고 전 총리의 전격 행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점이 있다. 그동안 대권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참아왔던 인내심이 한계점에 이르러 마침내 권력욕으로 폭발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자신감이 생긴 것인지 국민들이 판단해 줄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