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무대 ‘조깅하고 싶지 않다’
이봉주는 8월 1일 현재 강원도 횡계에서 하계 전지훈련을 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년 찾았던 이봉주의 훈련 코스다. 이제 한여름에 횡계에서 가을 풀코스 도전을 위해 훈련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봉주는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심경을 밝혔다.
“난 충청도(천안) 농부의 아들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을 대표해서 큼직한 A급국제대회에만 출전하다 보니 고향을 위해 한 것이 별로 없더라. 몇 년 전 충남체전 때는 이봉주 마라톤코스까지 만들어줬다. 수구초심이라고, 이제 은퇴하려고 하니까 고향생각이 났다. 은퇴경기 즉 마지막 풀코스 무대는 향토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는 전국체전에서 충남대표로 뛰기로 했다.”
마침 이번 체전은 대전에서 열린다. 충청남도는 아니지만 같은 충남권으로 이봉주에게는 고향에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네스북에 올라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 41회 마라톤 풀코스 완주(43회 도전)가 대전 시내에서 이뤄지게 된 것이다.
오인환 삼성전자육상단 감독도 “이봉주라는 선수가 은퇴무대를 고르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전적으로 본인의 판단을 존중했다. 더욱이 화려한 큰 대회가 아니라 전국체전에서 고향을 위해 뛰겠다고 하니 의미가 깊다”며 반겼다. 사실 알고 보면 오 감독도 충남 공주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봉주와 전국체전의 인연이 유난히 깊다는 사실이다. 이봉주는 만 20세이던 1990년 충북 전국체전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데뷔했다. 2시간19분15초로 준우승. 김완기 황영조에 이어 한국마라톤에 또 한 명의 기대주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이봉주가 향후 20년 동안 태극머리띠를 동여맨 채 한국마라톤을 이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초창기 마라토너 이봉주는 전국체전과 함께 성장했다. 처음에는 서울시청 소속이었지만 전국체전 선전으로 ‘마라톤명가’ 코오롱으로 스카우트됐고 93년까지 빠짐없이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91년 72회 전국체전에서는 2시간14분30초의 개인 최고 기록으로 첫 우승의 기쁨을 안았고, 92년에는 9위에 그쳤지만 93년 대회에서는 2시간10분27초의 호기록으로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93년 12월에는 전국체전 우승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첫 국제대회인 호놀룰루마라톤에 출전, 깜짝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봉주는 이후 2008년까지 15년간 전국체전 마라톤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사이 4번의 올림픽 출전으로 은메달 1개, 보스턴마라톤 우승, 한국신기록 2회 작성, 아시안게임 2연패 등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레이스로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가장 먼저 골인하고 싶다
“우승이나 기록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그저 마지막까지 열심히 준비했고, 또 잘 뛰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마지막 레이스를 준비하는 ‘마라톤의 산 거장’ 이봉주는 이렇게 말했다. 은퇴에 대해서도 “많이 뛰었고, 이제 그만 달릴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봉주의 지인들은 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또 그 성실함 뒤에는 남다른 승부근성이 있다는 것을. 이봉주는 결코 마지막 은퇴 레이스를 ‘조깅’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적당히 완주하고 꽃다발이나 받고 끝낼 생각은 없다.
은퇴 레이스를 준비하는 이봉주는 현재도 국내 톱랭커다. 불혹의 나이지만 아직 한국에서 이봉주를 상대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확실하게 이긴다고 자신할 선수는 거의 없다. 역대 4번의 전국체전에서 2회 우승에 모두 톱10에 든 이봉주는 이번 체전에서도 여전히 우승 후보 중 한 명이다.
여기에 이봉주의 후계자로 꼽히는 지영준(경찰대), 이명승(삼성전자) 등은 8월 세계선수권 출전으로 전국체전에 출전하지 않는다. ‘은퇴경기에서 우승하는 진기한 장면’이 연출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은 것이다.
삼성전자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은 “이봉주 선수를 잘 안다. 마지막인데 서울마라톤이나 춘천마라톤에서 아프리카의 세계 랭커들을 상대로 버거운 레이스를 펼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적당히 완주하는 것으로 은퇴 경기를 마무리하기에는 이봉주 선수는 너무 성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은퇴 경기라고)결코 설렁설렁 뛰지는 않겠다. 몸이 안 돼 우승을 놓치면 모를까 일단 스타트라인을 출발하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라토너다. 우승? 기록? 그건 하늘만이 알지 않겠나?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봉주 특유의 선해 보이는 웃음과 함께 나온 말이지만 그 뉘앙스에서 ‘나는 마지막 레이스까지 최선을 다해서 가장 먼저 골인하고 싶어’라는 속내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