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희생양 삼아, 나라도 살고 보자’
보통 실무자 소환과 구속, 이후 오너 일가에 대한 직접 수사가 이뤄지는 게 대기업 수사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찰 수사가 시작된 이후 오너 일가의 최고위 인사가 가장 먼저 구속됐다.
배임수재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지난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계 관계자는 “신 이사장의 구속에 이원준 롯데쇼핑 대표 등 신동빈 회장 최측근의 진술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대표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신 이사장의 지시로 네이처리퍼블릭을 롯데면세점에 입점시키고 매장 위치도 좋은 쪽으로 변경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이라면 이례적이다. 전문경영인이 오너 일가의 범죄 혐의를 뒷받침하는 진술을 하는 것은 흔치 않다”고 설명했다.
롯데그룹 측은 이번 신 이사장의 구속이 개인적인 비리일 뿐이라고 한정하고 있다.
신 이사장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부인 노순화 씨 사이의 유일한 자식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신동주-신동빈 형제는 신 총괄회장과 일본의 동거인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재 법적으로 신 총괄회장의 부인은 노 씨뿐이다. 시게미쓰 하쓰코 씨는 사실혼 관계일 뿐 혼인신고가 되지 않았다. 종합하면 신 총괄회장의 가족 가운데 법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신 이사장이다.
현행 민법에서 성년후견인은 가정법원이 직권으로 또는 피성년후견인, 친족, 이해관계인, 검사 등의 청구로 선임한다. 피성년후견인의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 신 총괄회장에게 성년후견인이 지정된다면 유일한 법적 배우자의 자식인 신 이사장은 가장 유력한 후보일 수 있다. 성년후견인의 법정대리 권한 범위를 정하는 데도 본인, 배우자, 4촌 이내의 친족 등의 청구로 변경될 수 있다. 다만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 즉 범법자는 성년후견인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롯데 측이 신 이사장 비리를 개인비리로 선을 긋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애초 이번 수사는 네이처리퍼블릭의 롯데면세점 입점로비에서 시작됐다. 의혹의 시작이자 ‘창립자의 장녀 구속’이라는 성과는 향후 검찰이 추가로 오너 일가를 구속기소할 부담을 줄여줄 수도 있다는 논리다.
신 이사장은 호텔롯데 등 8개 핵심회사의 등기임원일 뿐 아니라 롯데제과(2.52%), 롯데칠성(2.66%), 롯데쇼핑(0.74%)의 주주다. 신 이사장이 이끄는 롯데장학재단은 롯데제과(8.69%), 롯데칠성(6.28%), 대홍기획(21%)의 대주주다.
신 이사장은 사실상 40년 이상 한국 롯데그룹에서 쇼핑 부문을 직접 키운 인물이다. 2011년 신동빈 회장이 한국롯데 경영을 총괄하면서 입지가 크게 좁아졌지만, 여전히 그룹 사정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다. 상당한 인맥과 정보를 갖췄을 가능성이 크다. 신 회장 법적 직계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 이름을 쓰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일한 토종 한국인이다.
관전 포인트는 신동빈 회장 측에서 신 이사장에 대한 등기이사 해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해임 등의 조치를 언제 어떻게 취하느냐 여부다. 등기이사 해임이 이뤄지면 회사 경영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있다. 롯데장학재단에서 신 이사장을 끌어내리면 롯데제과와 롯데칠성 등의 지분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하지만 당장 신 이사장이 위협이 안 된 상황에서 섣불리 나설 경우 부메랑이 될 위험도 존재한다.
현행 상법상 주식회사 등기임원은 주주총회특별결의(참석주주의 3분의 2 이상과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사항이다. 발행주식 수의 3분의 1 이상이 반대하면 해임이 어렵다. 일본 롯데홀딩스가 지배하는 호텔롯데는 비상장이어서 해임이 쉽지만, 다른 상장 계열사들은 주총 표대결을 거쳐야 한다. 설령 해임안이 가결되더라도 가처분소송 등 복잡한 싸움으로 발전될 수 있다. 롯데장학재단의 경우 공익법인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임원직을 상실한다.
재계 관계자는 “예전 다른 그룹 총수들의 경우에도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재판 중에 등기임원직을 유지한 사례가 있다. 신동빈 회장을 비롯해 그룹 최고위층이 구속기소될 가능성도 아직 배제하기 어렵다. 섣불리 신 이사장에 대한 조치에 나설 경우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자칫 신동빈 회장도 구속과 동시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신동빈 회장은 현재 한국 롯데 지주사 격인 호텔롯데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법적 문제가 불거져 경영자로서 타격을 입는다면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고, 이 경우 그룹 경영권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신동빈 회장 입장에서는 신상에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는 만큼 그 전에 최대한 빨리 호텔롯데를 상장해 실질적인 지배력, 즉 지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