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판도 뒤엎을 이벤트?
▲ 북한을 방문한 이해찬 전 국무총리(왼쪽)가 8일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연합뉴스 | ||
이해찬 전 총리가 대북 특사로서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지난해 10월경부터 정치권에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 전 총리는 3·1절 골프 파동으로 총리직에서 낙마한 뒤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 2006년 10월 대통령 정무특보단에 전격 위촉됐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드디어 전략통 이 전 총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2007년 대선을 위해 뭔가 일을 꾸밀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이 전 총리와 친분이 깊은 A 씨는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이 전 총리를 정무특보로 위촉했을 때 그를 이미 대북 특사에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안다. 당시 일각에서는 ‘6자회담이 풀리면 곧바로 이 전 총리가 특사로 방북하게 될 것’이란 섣부른 예측까지 내놓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사석에서도 새 총리감으로 ‘이해찬 같은 사람 어디 없느냐’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받는 인사다. 그런 상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이 전 총리가 이번에는 노 대통령과 교감 하에 정권 재창출을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북 화해 무드 조성은 그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여권에서는 한반도 냉전 체제 종식에 따른 대선 구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 전 총리는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남북문제와 관련, 노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사실상 컨트롤 타워로서 이번에 방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번 그의 방북에 노 대통령 최측근 안희정 씨가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는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공식적으로는 안 씨의 역할론을 부인하고 있지만 정황상 심증이 가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여권은 이 전 총리 중심으로 한반도에 평화 무드를 조성해 12월 대선을 ‘평화 대 전쟁’ 구도로 변화시킨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열린우리당 사무처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선의 핵심은 ‘이슈’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는 한나라당이 경제 중심의 이슈를 짜고 그것에 대비하고 있지만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여부에 따라서 여권이 선거 구도를 급변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당의 경제 우위론 대선 구도가 허물어질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전략 관계자들도 이에 대한 토론과 페이퍼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일요신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여권은 대북 평화 무드에 대비, 대북 사업과 관련된 획기적인 대선 공약을 마련 중에 있다고 한다. 앞서의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현재 열린우리당은 대선을 앞두고 남북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 각종 대북 프로젝트 공약을 개발 중이다. 북한의 임진강을 공동 이용하는 물류 개발 계획도 포함돼 있는데 현재 통일부와도 사업 타당성을 협의 중에 있다. 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한반도 대운하 계획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현실성이 높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이 전 시장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다”라고 밝혔다. 현재 여권은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의 핵심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맞불을 놓기 위해 남북 대운하 사업을 진행 중이라는 얘기다.
한편 명지대 김형준 교수도 이 전 총리의 방북을 계기로 향후의 대선 구도에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예상한다. 그는 “범여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 구도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서 지지도 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가운데 중요한 이슈가 바로 향후 선거 구도를 ‘평화 대 전쟁’으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즉 12월 대선을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세력’과 ‘한반도에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간의 대결 구도로 짜는 것이다. 만약 2007년 대선의 시대정신으로 ‘민족과 평화’가 부각된다면 현재 지지도면에서 한나라당이 크게 앞서고 있지만 대선이 임박할수록 열린우리당에 추격당할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김 교수는 남북문제와 관련된 정계개편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 그는 “‘평화’ 대 ‘냉전’의 전환된 구도 속에서 한나라당 일부가 탈당, 범여권과 만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범여권 중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합한 세력과 만나게 될 경우 ‘동서통합 남북평화’란 두 가지 명분을 모두 갖게 돼 파괴력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가능성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중심에 있다. 정치권에서는 일찍부터 지지율에서 뒤지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연대를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양측은 지역 구도를 깨고 동서 화합을 이루고, 냉전구도를 깨고 남북 평화를 이루는 일거양득의 명분을 내세워 현재의 이 전 시장 대세론을 위협할 수도 있다.
한편 여권의 대선 새판짜기 계획에 대해 한나라당도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형근 최고위원은 최근 “현 정부가 8월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9월 ‘남·북·미·중 4자회담’ 등을 통해 올 연말 대선을 ‘평화 대 전쟁’ 구도로 재편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이 대선 개입을 공언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절실하다”며 한나라당에 철저한 대비를 주문하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인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도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은) 대선 전략의 일환이라고 확신한다. (참여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이 이번 대선에 하나의 새로운 변수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것을 집요하게 추진하는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질 경우 한나라당 중심의 대선 판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북한이 남한 대통령과 만나서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많은 국민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을 상쇄될 수 있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전망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이 전 총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남북문제가 이번 대선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특히 이 전 총리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고 해도 그 자체에 대한 파괴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먼저 국민여론이 대북 관계에 대해 그리 전향적이지 않다. 지난 2월 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북대화는 시간을 갖고 북한의 의도를 파악한 뒤 천천히 해야 된다”는 의견이 65.3%로 “최대한 빨리 재개해야 한다”는 응답 31.9%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국민 전체적으로 이처럼 남북대화 재개에 대해 신중한 의견이 우세해 ‘북한 변수’가 이번 대선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특히 리서치 전문기업 엠브레인이 지난 6~7일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은 다음 정권이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51%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12월 같은 조사의 34.2%보다 더욱 늘어난 것으로서 대선이 다가올수록 남북관계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는 국민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정상회담 성사는 범여권 후보의 급부상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드러난 것처럼 북한 변수의 파괴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데다 대북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시각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어 정상회담 이슈가 대선 구도를 바꿀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남북정상회담 자체는 대선 구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 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대선 구도가 지난 대선 때처럼 진보 대 보수의 전선으로 형성되면 앞서 나가던 한나라당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직된 대북 정책을 표방해온 한나라당 후보가 평화체제로의 이행과 관련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 전 총리의 방북은 대권 고지의 7부 능선까지 점령한 것으로 보고 있는 한나라당에게 위협적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조성 무드가 대선으로까지 연결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바닥을 기고 있기 때문에 여권이 국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느냐에 따라 대선 구도도 그들이 바라는 ‘평화 대 전쟁’의 대결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