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이해찬 킹메이커 유시민’ 만지작
▲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5월 19일 광주·전남 시민사회 인사들과 함께 무등산 등반을 했다. 이날 노 대통령은 ‘통합 대세론’에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여 관심을 모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대권밀약설의 정점에는 노 대통령과 이 전 총리, 그리고 유 전 장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범여권 통합론이나 거취 문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동시다발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뒤 다음날(5월 19일) 무등산을 등반하면서 시민과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즉석 연설에서 “내가 속한 조직의 대세를 거역하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작년 말 내가 지역주의 통합이 적절치 않다고 이야기한 것은 지금도 대의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분열되고 깨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당이 절차를 밟아서 규칙에 따라 통합을 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든지 따르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대의를 지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지만 대세를 거부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수용론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노 대통령이 범여권 통합론과 관련한 입장 변화 발언을 한 다음날 유 전 장관은 청와대를 방문해 노 대통령을 만났다. 유 전 장관은 이날 노 대통령에 장관직 사퇴 및 당 복귀 의사를 표명했고 노 대통령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전 장관이 2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사퇴 의사를 공론화한 것도 전날 노 대통령과 조율이 끝났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날 이밖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범여권 빅뱅과 대선구도 등 민감한 정치현안과 관련한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갔을 것으로 정치권 관계자들은 관측하고 있다.
유 전 장관의 갑작스런 당 복귀 배경을 둘러싼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이번에는 대표적인 친노주자로 거론돼 왔던 이해찬 전 총리가 대권출마 쪽으로 마음을 굳힌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정치분석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 전 총리가 22일 저녁 친노그룹 의원들과 만찬을 가진 것은 대선출마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 짙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이날 범여권 대통합 및 대선 국면에서의 역할론을 강조한 것으로 복수의 참석자들은 전하고 있다.
그는 특히 범여권 대통합론과 관련해 “당 사수론으로 왕따를 당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통합 신당이라는 2·14 전당대회 결의를 준수해야 한다. 소수가 되어선 안 된다”고 당부하면서 노 대통령에게도 ‘대통합 신당을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대세론에 편승한 대통합 수용론도 결국 친노그룹이 구상하고 있는 대권 마스터플랜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 이 전 총리, 유 전 장관의 일련의 행동에 무엇인가 연결 고리가 보이는 듯한 대목이다. 연말 대선과 내년 총선을 겨냥해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치밀한 계획 하에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해찬 전 총리(왼쪽), 유시민 전 장관 | ||
‘유 전 장관이 킹메이커 역할을 한다면 굳이 서둘러 당에 복귀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기자가 반문하자 A 씨는 “범여권 2차 빅뱅이 초읽기에 돌입한 상황에서 유 전 장관의 당내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고 단언했다. 유 전 장관이 당에 복귀해 당 사수론에 강 드라이브를 걸 경우 통합파들에게 탈당 명분을 제공해 친노그룹이 고립될 것이란 분석에 비춰볼 때 다소 의아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A 씨의 주장은 나름대로 논리가 있었다. 그는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은 두 마리 토끼 사냥에 나서고 있다”며 “노 대통령과 이 전 총리는 친노그룹의 고립화를 차단하기 위해 대통합 카드로 범여권 대통합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유 전 장관은 대통합으로 선회해 자칫 와해될 수 있는 개혁파 등 친노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심축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유 전 장관의 당 복귀가 서둘러 결정된 배경에는 친노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고 대통합의 물꼬를 트기 위한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의 대권플랜이 투영돼 있을 것이란 게 A 씨의 주장이다.
A 씨의 주장처럼 유 전 장관은 당 복귀 후 대권출마 가능성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동시에 당분간 조용히 지내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유 전 장관은 2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긴 출장에서 돌아온 느낌”이라며 당 복귀 소감을 밝힌 후 “당분간 책 쓰는 일에만 매달리겠다. 신문 정치면에 등장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과 달리 유 전 장관이 복귀 후 조용한 행보 모드로 돌입하자 강경 사수파인 유 전 장관과의 충돌을 명분으로 탈당을 저울질했던 해체파 의원들의 대규모 탈당 움직임도 잠시 주춤하고 있는 분위기다. 일부 해체파 의원들은 노 대통령과 친노 대표주자로 부상한 이 전 총리가 대통합론으로 선회하고 있는 만큼 당에 남아서 패권 투쟁을 벌이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열린우리당 대주주인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이 6월 14일 이후 탈당을 선택할 경우 2차 빅뱅을 피할 수 없겠지만 ‘유시민 변수’에 따른 탈당 기류는 당분간 조성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이해찬 카드를 꺼내든 배경에는 DJ와 호남민심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범여권 대통합은 물론 연말 대선에서도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지역주의 회귀 반대’ 소신을 꺾고 대세론을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전 총리는 DJ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을 지내는 등 DJ와 각별한 정치적 인연을 맺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통합을 반대하고 있는 민주당 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있고 당내 반노·비노세력의 거부감도 크지 않다. 특히 노 대통령과 DJ의 신뢰를 받고 있고 충청 출신이라는 지역적 기반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전 총리가 적지 않은 약점과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지만 범여권을 아우르는 경쟁력 있는 대권주자로 부상할 수 있는 자산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이 전 총리를 대선후보로 적극 지원할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그가 갖추고 있는 이러한 자산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의기투합해 이 전 총리를 지원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일부에서는 이 전 총리도 ‘킹’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킹메이커’로서 범여권 대선후보 경선의 불쏘시개를 자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직 친노그룹 내에서도 대표주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며 더구나 지지부진한 범여권의 움직임을 놓고 볼 때 이 전 총리의 행보에는 범여권을 분발시키려는 의도도 잠재한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 대통령과 그 복심이랄 수 있는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전 총리-유 전 장관’의 앞으로 행보가 당분간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