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과 동시에 서바이벌 시작
▲ 지난 5월 22일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가운데)의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출판기념회에 김근태 전 의장(왼쪽) 손학규 전 지사(오른쪽) 등 대선 주자들이 참석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간의 양자 대결구도로 좁혀진 한나라당 경선구도와는 달리 범여권의 대권 대진표는 복잡하기만 하다. 선수는 많지만 게임 룰과 방식, 일정 등 어느 것 하나 갖춰진 게 없어 아예 대진표 자체를 짜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연말 대선과 경선 일정 등을 감안하면 6월 중순을 전후해 어떤 식으로든 대진표의 윤곽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시간을 잘못 관리하면 콜드게임으로 끝나게 된다’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말이 단순한 수사로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 범여권 주변에서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잠룡들은 무려 10여 명이 넘지만 유력 후보군은 4~5명으로 좁혀지고 있다. 한때 유력한 범여권 제3후보로 거론됐던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중도하차한 이후 비정치인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기성 정치인으로 압축되고 있는 분위기다. 한자릿수 지지율을 벗어나지 못해 당 안팎에서 불출마 압박까지 몰아치며 ‘대권은 물 건너 간 게 아니냐’는 혹평을 받아왔던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의 주가가 다시 상승할 조짐이 일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한나라당 탈당 이후 범여권 주자로 분류되면서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손학규 전 지사와 최근 대권출마 의사를 시사해 친노그룹 대표주자로 급부상한 이해찬 전 총리도 범여권 대선레이스를 주도할 유력 후보로 주목받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범여권 6월 빅뱅이 현실화될 경우 정·김 전 의장, 손 전 지사, 이 전 총리 등 범여권 ‘대권 빅4’를 정점으로 세력분화 및 범여권 새판짜기가 진행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들 ‘빅4’의 정치적 선택과 역할에 따라 지지부진한 통합 향배는 물론 범여권 경선 대진표도 어느 정도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또 연말 대선이 6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춰 볼 때 이들 ‘빅4’를 중심으로 한 대권 서바이벌 게임도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 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빅4’는 범여권 통합신당론이 제 정파 간 복잡한 이해관계로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자 나름대로 범여권 단일후보 선출 구상안을 내놓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대권출마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이 전 총리는 22일 당내 일부 친노 의원들과 만나 ‘가설정당을 만들어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를 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고 김 전 의장도 23일 ‘임시정당을 만들어 대선주자를 뽑자’고 제안한 바 있다.
▲ 이해찬 전 총리. | ||
이런 가운데 범여권 빅뱅과 대선구도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핵폭탄을 쥐고 있는 정·김 전 의장의 최후 선택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친노그룹 대표주자로 급부상한 이 전 총리가 대통합론에 유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당 사수파와 통합파간의 2차 전쟁 기류에 또 다른 변수가 나타난 셈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탈당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2일 대규모 출판기념회를 통해 사실상 대선출정식을 가진 정 전 의장은 통합의 마지노선으로 잡혀있는 6월 14일을 전후해 탈당을 결행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김 전 의장이 제안한 ‘범여권 대선주자 7인 연석회의’는 ‘탈당 후 제3지대 창당론’에 방점을 두고 있어 탈당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정·김 전 의장이 24일 비공개 단독회동을 통해 범여권 통합 문제 등과 관련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점도 심상치 않다. 이날 만남은 김 전 의장의 대권주자 연석회의 구성 제안에 대해 정 전 의장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두 사람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날 만남에서 두 사람은 연석회의 구성 등 범여권 통합에 적극 협력하기로 하는 한편 탈당 등 자신들의 거취 문제와 관련해서도 의견을 교환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두 사람이 현 지도부가 주도하고 있는 통합작업에 성과가 없을 경우 6월 14일을 전후해 동반 탈당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런 관측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열린우리당을 이끌어 온 양대 산맥인 정·김 전 의장의 최후 선택이 탈당 쪽으로 기울면서 2차 탈당 대열에 참여할 의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두 사람의 정치적 지분과 대통합론만이 살 길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범여권 기류를 감안하면 50~60명이 탈당대열에 합류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당사수파를 대표하는 유시민 전 장관의 당 복귀 이후 이목희 의원 등 초재선 소장파 20여 명과 오래전부터 ‘당 해체 후 대통합’론을 주창해 온 정대철 고문 등 측근 의원 10여 명도 탈당 대열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 통합파 의원들은 유 전 장관이 당 사수 입장을 고수할 경우 6월 초부터 순차적으로 탈당을 결행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어 이제 범여권 2차 빅뱅은 정·김 전 의장의 최후 선택과 맞물려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범여권 일각에서는 강경파인 유 전 장관이 통합파와 충돌할 경우 열린우리당은 소수정예의 친노그룹만 남게 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 전 총리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풍부한 국정운영 경험과 탁월한 업무추진능력, 여기에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대권주자로서 경쟁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경한 이미지와 골프 구설수 등 약점도 적지 않지만 친노그룹 진영에선 노 대통령의 적통자로 이 전 총리만한 인물이 없다는 공감대가 커져가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친노그룹은 386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해찬 대통령 만들기’ 플랜을 물밑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전 총리는 자신의 대망론과 관련한 정확한 속내는 아직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대선 역할론을 강조하며 언제든 대권레이스에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범여권 일각에선 대선 기획통으로 유명한 이 전 총리가 킹이 아닌 킹 메이커 역할로 범여권 대선구도를 주도해 나갈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이 전 총리가 킹을 선택할지 아니면 킹메이커 역할에 만족할지 여부는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그의 선택과 향후 행보는 친노그룹의 생존 플랜은 물론 범여권 대선구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독자 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는 손 전 지사는 거침없는 대권행보로 범여권 대표주자 입지를 확고히 다져가고 있다.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범여권 인사들과의 접촉을 확대하고 있는 손 전 지사는 6월 17일 발족할 예정인 ‘선진평화연대’를 독자세력화의 전진기지로 삼고 본격적인 세몰이에 나설 방침이다.
손 전 지사가 범여권 주자 중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만큼 그를 지원하는 세력들도 늘고 있다. 정대철 고문은 손 전 지사가 범여권 대선경선에 참여할 경우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김부겸·신학용·조정식 의원 등 손 전 지사와 가까운 열린우리당 의원 10여 명도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한나라당 경기도권 일부 의원들도 손 전 지사의 독자세력화가 탄력을 받게 될 경우 참여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23일 기자와 만난 손 전 지사 캠프의 한 관계자는 “손 전 지사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세력들이 많다”며 “복잡한 당내 사정 등으로 드러내놓고 지원은 못하고 있지만 막후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현역 의원들도 10여 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열린우리당 일부 당직자는 이미 독자신당의 전진기지 역할을 할 선진평화연대로 자리를 옮기는 등 세몰이도 탄력을 받고 있다”며 “범여권 빅뱅이 현실화되면 우리 측에 합류할 의원들이 적어도 20명은 넘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범여권 2차 빅뱅을 예고하고 있는 6월이 다가오면서 정동영·김근태·이해찬·손학규 등 이른바 범여권 ‘대권 빅4’의 대권행보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는 형국이다. 범여권 세력재편 및 대선구도를 흔들어 놓을 6월 빅뱅정국에서 누가 유리한 대권고지를 선점할 것인지 ‘빅4’의 6월 대혈투도 카운트다운에 돌입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