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본능… 대통령 빼고 다 덤벼라
▲ 이해찬 총리가 지난해 6월 취임 이후 상대를 가리지 않는 ‘독설’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여권과 이 총리측은 “떨어져 나가는 민심보다 새 지지층 확보효과가 더 크다”며 손해볼 것 없다는 분석이다. | ||
어느 정권에도 2인자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역할과 지위는 어느 정권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도 “특별한 사안이 아니면 총리와 상의해서 처리하라”고 청와대와 내각에 주문할 정도. 이쯤 되면 DJ정부 최고 실세라던 박지원 전 장관도 울고 갈 만하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총리에 대한 대통령의 믿음은 대단하다. 대통령의 고집을 꺾는 유일한 사람이 이 총리다. 이 총리의 판단력, 정치적 신념을 높이 사고 있다”고 전했다. 그가 여권 내의 대권주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데에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도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는 총리로 취임한 지난해 6월 이후 줄곧 ‘전쟁’을 치러왔다. 그가 치른 전쟁의 대부분은 대통령을 대신한 것이었다. 전쟁을 함에 있어서 그는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지키고 개혁 과제 완수라는 임무 앞에서 그는 때와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그런 그를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많아졌지만 이 총리는 그럼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이 총리 특유의 독설은 얼마 전 또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택한 싸움터는 국회였다. 지난해 정기국회를 13일간 파행으로 만들었던 이 총리의 “한나라당은 차떼기당” 발언이 있은 지 딱 1년 만이다.
대정부 질의가 시작된 지난 10월24일부터 이 총리는 기다렸다는 듯 한나라당과 또 한번 설전을 시작했다. 싸움의 절정은 통일 외교분야 질의가 있던 25일이었다. 당시 문제가 됐던 이 총리의 발언을 정리하면 이렇다.
“외국 의원들이 방청중인 이 자리에서 답변하는 게 창피하다. (한나라당이 색깔론을) 충분히 이용했는데, 이렇게 계속되는 건 국회 품위에도 도움이 안 된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이간전술에 말려들 정도로 내가 미숙한 총리가 아니다.”(참여정부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돈 들여서 여론조사까지 했다니까 공은 들였는데, 그럴 만한 가치 있는 질의는 아닌 것 같다. 의원들이 품위 있게 질의하고 사리에 맞게 질문하면 정중하게 답변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저도 상응하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대부도 땅투기 의혹과 관련, 사퇴 의사를 묻는 질문에 대해)
“총리는 훈계를 들으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 정책 답변을 하러 나온 사람이다. 왜 총리에게 훈계를 하느냐.”(불성실한 답변 태도를 질타하는 한나라당에 대해)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갔던 사람들이 요즘에 와서 이념적인 정체성 문제를 주장하는 걸 보면서 사람이 살면서 ‘참 별꼴 다 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참여정부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알아서 판단하라.”(‘아직도 한나라당은 나쁜 당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나 이번 그의 독설 파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이 총리의 독설에 ‘면역’이 생겨버린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응도 지난해와는 달랐고 여당 의원들의 지원사격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 사람 막말하는 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면역이 생기기는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이 총리의 “별꼴 다 본다”는 발언이 있던 다음날인 26일 저녁 본회의장을 나서던 한 여당 의원은 “본인이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이니 속은 시원하겠지만 보는 사람은 불안해서 못 보겠다. 틀린 말은 없어도 이젠 좀 그만했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다”라며 지난해와는 달리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 총리와 가까운 한 중진 의원도 “이 총리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다른 욕심은 없는 사람 같다. 총리의 발언으로는 좀 무게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고 웃어 넘겼다.
이처럼 달라진 주변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한나라당 강재섭 원내대표가 “한나라당이 국회 파행을 할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참아 왔다. 대정부질문인지 정부쪽의 대국회질문인지, 국회 교육장소인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행패”라고 이 총리의 답변태도를 맹비난한 다음날인 27일 이후 그의 답변 태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겸손한 말투로 상대방을 칭찬하는 등 ‘이 총리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한나라당 서병수 의원이 “이 총리는 오만과 독선의 극치”라는 시민들의 인터뷰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 총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이 총리의 답변 태도는 정가에서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 이해찬 총리(왼쪽)와 김근태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
손해볼 일 없기로는 정부나 여당뿐 아니라 이 총리 개인도 마찬가지라는 분석이 많다. “독설로 인해 떨어져 나가는 민심보다는 새롭게 생기는 지지층의 확보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여당의 한 관계자는 “그가 한나라당 등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이유의 60% 정도는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40% 정도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대중성이 거의 없던 그가 어느새 대권 주자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고도의 전략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최근 자신의 글을 통해 “(이 총리의 이런 태도는) 천성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전략”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 총리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고 있는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 총리의 취임 이후 행보에 충분히 공감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이 총리는 기본적으로 정치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이다. 정치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요리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평가에 개의치 않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것저것 재는 사람은 저렇게 말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가장 비정치적인 정치인이다”고 평했다.
앞서 언급한 것같이 이 총리의 ‘막말 정치’는 지난해 5월 총리 취임 이후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대상은 ‘그때 그때 달랐다’.
오일 게이트와 행담도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온 지난 6월, 이 총리는 “지금이 (대통령의) 측근이나 사조직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는 발언을 했다가 대통령 측근인 염동연 의원으로부터 “총리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말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술에 취해 “<조선>과 <동아>는 역사의 반역자다. 내 손아귀에 있다. 까불지 말라”는 말을 해 역풍을 맞기도 했다. 지난 5월 수도권 공장 신·증설 문제로 손학규 경기지사와 갈등을 빚을 당시 “정치적으로 말하면 나는 고수에 속한다. 손 지사는 한참 아래. 현재의 시도지사 중엔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해 논란을 빚은 것도 유명한 일화다.
이와 관련, 이 총리측의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의 정치행태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게 이 총리의 기본적인 생각인데다 원래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생기는 일일 뿐이다”며 “의원시절, 장관 시절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총리가 되고 나서 오만해졌다고 보는 것은 이 총리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고 말했다.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도 그의 칼날 같은 공격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김 추기경이 최근 한 일간지와의 회견에서 동국대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과 관련 “우리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이에 대해 이 총리는 “종교지도자인 추기경이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한 것 같다”고 비판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김 추기경이 이 총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지난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 총리가 구속됐을 당시 그의 석방에 가장 앞장선 사람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젊은이들을 죽이면 안 됩니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고 주장한 인물이 바로 김 추기경이었다. 이러한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며칠 후 감형 조치를 받게 됐고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인태, 이철, 이강철씨 등 현 여권 핵심 인사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총리는 당시 유신체제 비방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 등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가 11개월을 복역한 후 풀려났다.
이 총리의 한 지인은 “자연인 이해찬은 개인적으로 추기경을 존경하지만 총리 이해찬은 정부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로 김 추기경에 대한 이 총리의 발언을 ‘변호’하기도 했다.
이 총리가 현 정권 들어 보인 언행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익명을 요구한 한 정신과 전문의의 ‘정치인 이해찬 평가’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이 총리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비록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굽히는 적이 거의 없다. 강한 소신에 따른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상대적인 우월성, 도덕성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또한 굉장한 자기 확신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칫 자만과 자기통제력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가치가 벽에 막히거나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상실했을 때가 그렇다.
어쨌든 그는 흔치 않은 캐릭터를 갖고 있다. 누가 봐도 그는 싸움닭이다. 싸움닭의 능력은 전투력으로 평가된다. 외모나 색깔,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싸움에 치중하다보니 다른 것에 소홀해지고 중요치 않게 생각되는 것이다. 자신의 측근들과 관련된 크고 작은 문제점이나 대부도 땅 투기 의혹과 같은 문제가 그에게 올바른 비판으로 인식되지 않고 인신공격으로 비춰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