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나온 남자 ‘검의 칼’도 구부릴까
▲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지난 5일 고려대학교 개교 104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교우회장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61학번 동기로,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천 회장은 박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 나선 의혹을 받고 있다. 정치권과 몇몇 시민단체에서는 이 대통령과 천 회장 간의 대선자금은 물론 지난 2008년 총선자금에 대한 수사도 촉구하고 나섰다. 검찰이 현 정권 ‘판도라의 상자’로 떠오른 천 회장을 어디까지 수사할 수 있을지 국민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천신일 회장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했다.
1943년 부산에서 태어난 천 회장은 ROTC(3기)로 군복무를 마치고 30대 초반이던 1974년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처리하는 ㈜제철화학을 세우며 기업경영에 뛰어들었다. 당시 천 회장은 회사 수익금의 35%를 포항제철이 운영하는 장학재단에 기부했는데 이를 안 박태준 전 회장이 천 회장을 “아들”이라고 부르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다는 후문이다. 천 회장은 제철화학을 경영하며 공장 설비 등을 국산화한 공로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78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 제철화학을 매각한 천 회장은 그 후 태화유운 동해산업 등의 회사를 설립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 회장이 본격적으로 재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1983년 세계항공과 중앙통운해운을 인수·합병해 ㈜세중여행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천 회장은 ‘마당발’ 인맥을 활용해 주요 기업의 해외 출장 업무를 따내며 회사를 키워나갔다. 세중여행은 1990년대 한때 국내 여행업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5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천 회장은 1995년 소프트웨어업체인 한컴리서치를 설립하며 영역을 확장했다. 한컴리서치는 2006년 세중나모로 사명이 변경됐고 같은 해 세중나모와 세중여행이 합쳐져 세중나모여행이 탄생하게 됐다. 천 회장은 지난해 초 세중에듀테인먼트를 세우며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고 5월엔 석영자원 개발업체 이너블루를 인수하며 태양광에너지 사업에도 진출했다(<일요신문> 860호 보도).
그렇다고 천 회장이 사업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천 회장은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명함을 내밀었다. 특히 레슬링에 대한 천 회장의 애정은 사석에서 지인들에게 “레슬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스포츠다. 또 다른 내 인생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 회장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권유로 1981년부터 대한레슬링협회에 몸담기 시작해 레슬링에 대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레슬링계에서는 ‘이건희 회장은 두목, 천신일 회장은 행동대장’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천 회장은 1997년 대한레슬링협회 25대 회장에 선출돼 2000년까지 재직했고 2002년에 다시 회장직을 맡았다. 덕분에 천 회장은 지난 2004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천 회장은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각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78년 인사동의 한 골동품가게에 갔다가 오래된 석조문화재를 일본인이 사려는 것을 보고 그곳에 있는 석조물 27점을 모두 사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이후 천 회장은 국내·외 석조문화재들을 사들였고 지난 2000년 7월에는 자비를 들여 국내 유일의 돌 박물관인 세중옛돌박물관을 열었다. 이밖에 천 회장은 지난 1985년 포항공대(포스텍)에 학교부지 20만 8265㎡(6만 3000평)를 기증했고 지난 2006년에는 자신이 보유한 세중나모여행 지분 일부를 사회에 헌납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007년 11월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를 포함, 몇몇 대학교와 사회봉사 단체에 이 지분을 기부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막강한 인맥을 자랑하던 천 회장은 재계와 정치권에서는 이미 ‘스타급 CEO’였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 이름이 다소 생소했다. 사실상 ‘무명’에 가깝던 천 회장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61학번인 천 회장은 이 대통령(경영학과)과 과는 달랐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투쟁을 이끌었던 ‘6·3동지회’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쌓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 둘은 같은 아파트단지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명절 때면 가족동반으로 식사를 할 만큼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지난 대선 때 천 회장은 자신의 친구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PK(부산·경남) 출신에 고려대를 나온 천 회장은 유력인사들을 직접 접촉해 이 대통령 지지를 이끌어냈다. 천 회장이 주도했던 고려대 교우회 산하 ‘K-포럼’ 인사들은 이 대통령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여들었다.
재정적으로도 천 회장은 캠프 운영 등에 쓰이는 자금 중 상당수를 조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선 직전인 2007년 12월 이 대통령이 낸 한나라당 특별당비 30억 원을 천 회장이 빌려준 것도 화제를 모았다. 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자신이 소유한 빌딩을 담보로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이를 갚았다. 이 같은 인연 덕에 천 회장은 이 대통령의 ‘재산환원추진위원회’ 위원장 후보로 한때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 천신일 회장이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 중국 방문 경제 수행인으로 따라갔다. 연합뉴스 | ||
이처럼 대선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배경으로 인해 천 회장은 현 정권에서 손꼽히는 ‘파워맨’으로 떠올랐다. 물론 천 회장은 “공직을 맡지 않고 사업에 전념할 것”이라며 세간의 이목을 떨치려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거론되는가 하면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외압 논란의 당사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천 회장이 박영준 국무총리실 차장과 함께 정준양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 입김을 넣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이처럼 ‘막후 실세’로 위세를 떨치던 천 회장이 야권의 표적대상이 된 것은 ‘박연차 게이트’ 연루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천 회장이 지난해 7월 이종찬 전 민정수석,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등과 함께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무마하기 위한 대책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천 회장은 이 과정에서 박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명박의 남자’ 천 회장과 ‘노무현의 남자’ 박 회장 간에 벌어진 은밀한 거래는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납득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천 회장과 박 회장은 어린 시절 부산의 한 마을에서 함께 살며 처음 만났고 1970년 박 회장이 공장 부지를 마련하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천 회장이 자신 소유의 땅을 무상으로 줬다고 한다. 천 회장이 오늘날 박 회장의 사업 기반을 마련해준 셈이다. 그 이후 둘은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며 ‘의형제’처럼 가깝게 지냈고 박 회장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땐 천 회장에게 조언을 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 회장은 지난 2004년 박 회장을 자신이 회장직을 맡고 있던 대한레슬링협회의 부회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2년 뒤 박 회장은 농협으로부터 휴켐스를 인수할 때 천 회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당시 박 회장은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사외이사들을 해임했을 뿐 아니라 천 회장 임명 후 이사 보수 한도를 8억 원에서 14억 원으로 대폭 늘려 내부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특별한 인연들 때문에 천 회장이 ‘박연차 대책회의’를 열었던 것이라는 의혹이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천 회장은 박 회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천 회장이 특별당비 명목으로 이 대통령에게 빌려줬다던 30억 원 중 일부가 박 회장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또한 대선 전에 자신과 가족들이 소유한 세중나모여행 주식을 매각해 306억 원을 마련하는 과정도 도마에 오른 상태다. 민주당이 지난 4월 23일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발의한 특별검사법, 이른바 ‘천신일 특검법’엔 이 부분에 대한 수사도 하도록 돼 있다.
일단 검찰은 공식적으로 “대선자금과 관련된 부분은 수사할 계획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자칫 현 정권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부담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반발이 적지 않다는 전언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정치 검사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 여과 없이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검찰은 천 회장 개인 비리에 초점을 맞출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당국은 올해 초부터 천 회장 주위를 샅샅이 뒤져 상당한 양의 자료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엔 국세청이 적발한 천 회장의 탈세 혐의도 포함됐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서는 이번 수사가 결국 ‘천 회장과 대선자금에 대한 면죄부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끊이질 않고 있다. 지금 천 회장이 사정 칼날을 비껴간다 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오히려 더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현 정권하에서 ‘수위조절’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천 회장과 청와대 간에 물밑 교감이 오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