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그대의 애인이고 싶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일째인 29일 새벽 봉하마을에서 발인식을 끝내고 영정사진과 운구차가 마을을 떠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10만여 회원을 지닌 노사모는 과연 향후 어떤 모임으로 남게 될까. 노사모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짚어봤다.
“캐나다 토론토입니다. 너무 힘들어하시는 권(양숙) 여사님께 작은 위로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봉하마을에 내려가실 분 같이 가요.” “서울역 분향소에 양초가 필요합니다. 작은 양이라도 각자 구하실 수 있는 만큼의 양초와 종이컵을 구해서 서울역 분향소로 보내주시고 더불어 노란 리본을 만들 수 있는 원단도 도움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전국과 해외 곳곳에서 노사모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회원들의 글이다. 노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부음에 이들은 자발적으로 전국의 분향소로 달려가 추모객으로, 또 자원봉사자로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곁에서 지켰다. 비단 노사모 회원들만이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의 예기치 못한 서거에 국민들은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했다. 노 전 대통령과 노사모의 상징이기도 한 노란색은 그의 영결식이 있던 5월 29일 ‘대한민국의 국가색’이요 눈물의 색깔이 되기도 했다.
알려졌다시피 노사모는 ‘대통령 노무현’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일개 정치 신인이었던 ‘야인 노무현’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려놓은 주역도 바로 이들이었다. 지난 2002년, 대한민국 정치사에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라는 새 역사가 쓰였다. 바로 노사모와 국민이 일궈낸 ‘사건’이었다. 한 정치분석가는 “한국 정치역사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노사모가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노사모 회원은 “우리는 스스로 흥에 겨워 그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그의 눈과 입이 되어주고, 그의 머리와 가슴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노무현과 같은 지도자를 만든 것으로 희망과 보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평하기도 했다.
‘정치인 팬클럽’의 시초인 노사모의 탄생은 공교롭게도 늘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곤 했던 정치권과 정치인에 대한 한 줄기 희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노사모가 출범한 것은 2000년 4·13 총선 직후. 당시 동서화합을 위해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무현 후보의 홈페이지에는 유권자들의 울분의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한 네티즌이 ‘노무현 팬클럽’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으며 모임이 가시화됐다.
이어 ‘팬’들이 4월 17일 임시게시판을 만들고 회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의 문이 열렸다. 고질적인 지역감정의 벽 앞에 번번이 고배를 마시면서도 “농부가 밭을 탓해서는 안 된다”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은 수많은 서민들의 가슴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사모’ 이전에도 ‘노하우’라는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노하우’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대중과의 교류를 이어갔던 ‘사람 사는 세상’의 홈페이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노하우의 사이버보좌관을 역임했던 황의완 씨에 따르면 ‘노하우’가 공식 오픈한 시기는 1999년 8월 15일이었다. 당시 종로구 국회의원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인터넷 여론 수렴을 위한 사이버보좌관을 모집했다. 여기에 응모했던 이들 가운데엔 PC통신 시절부터 ‘내공’을 쌓아온 논객들이 많았고 황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의도 정가에 인터넷 여론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훨씬 이전부터 ‘넷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 노 전 대통령이 시도한 ‘사이버 보좌관’의 활동은 경험부족으로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지만 당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은 이후 ‘노사모’가 탄생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노사모 홈페이지가 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뒤인 2000년 5월 17일. 한 달 후인 6월 6일엔 창립총회가 열리게 된다. 자발적 시민 모임인 ‘노사모’가 조직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자유 공간’ 덕분이었다. 일찌감치 인터넷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노 전 대통령 역시 노사모와 함께 호흡하는 것을 즐겼다.
노 전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군이었던 노사모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바보 노무현’ 열풍을 주도했다. ‘돈에서 자유로운 선거’를 하려 했던 노 전 대통령을 위해 ‘희망돼지’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희망돼지 저금통 사업은 서울 지역 노사모의 한 회원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으로 돼지저금통을 나누어주고 동전을 후원금으로 모아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운동이었다. 노사모를 주축으로 전국으로 ‘분양’된 희망돼지에는 수많은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들과 지폐들이 들어 있었고 대선 이후 집계된 희망돼지 적립금액은 총 4억 3000여만 원에 이르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역사보다 노사모의 역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사모를 아꼈다. 대통령 시절에도 그의 노사모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2006년 8월 노사모 멤버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그는 “고향집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자”고 약속했다. 퇴임 한 달 전엔 노사모 회원 15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노사모와 노 대통령의 ‘관계’가 애정 일변도로 이어져온 것은 아니다. 회원 수 10만여 명을 넘기며 여느 정치인 팬클럽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탄탄하고 공고한 지지 세력을 구축했던 노사모도 한때 균열의 위기를 겪었다. 내부 갈등으로 회원 수가 1만여 명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탈퇴자들이 늘어났던 것.
당시 노사모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통령을 단지 지지하고 감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내부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났던 것. 2003년엔 이라크전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노 대통령과 노사모의 견해가 어긋나면서 논란이 일었는가 하면, 2006년 당시 김병천 노사모 대표가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 만나 녹취한 발언이 유출되면서 ‘임기 후에도 손 놓지 않고 정치·언론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공개돼 정치권 공방이 가열된 바 있다. 또 임기 후반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이 과정에서 노사모 중 일부 지지자들의 이탈이 생겨나기도 했다.
반대로 적극적인 지지자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언행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노사모 내부에서도 한때 “노사모의 활동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2003년에는 노사모 존속 여부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기도 했다. 당시 존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해체해야 한다는 의견보다 높게 나와 존속이 결정되었지만 이후에도 존폐여부에 대한 고민은 적지 않았다.
이제 ‘노무현 없는 노사모’의 앞날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노사모 대표를 역임한 노혜경 씨는 지난 2002년 출간된 책 <유쾌한 정치반란 노사모>에 ‘노무현? 없어도 된다, 시스템의 정치!’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적이 있다. 노 씨는 이 같은 슬로건을 내세울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노사모는, 노무현이 없어도 되는 세상, 우리 자신의 자발적 참여정신이 마음껏 펼쳐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서로 격려하는 시스템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기능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적합한 시스템이다. 변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다른 노무현인 것이다”라고 밝혔다.
▲ 덕수궁 대한문 주변에는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하는 추모객들의 메모가 빼곡하다. 박은숙 기자 | ||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노사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제가 여러분의 소망을 저버릴 때 여러분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저를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살아온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자신이 남긴 말처럼 그는 결국 ‘인생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 속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지만 노사모에게 ‘바보 노무현’은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다. 노사모의 한 관계자는 “이제 노사모는 자유로워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굴레를 자신의 몸을 던져 풀어준 것이다. 노사모는 영원히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임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