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낸다” “떠난다” 파국으로 가나
▲ 14일 이명박 당선인이 중국의 왕이 외교부 부부장과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박근혜 전 대표가 옆에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다. 이 당선인은 박 전 대표를 뒤늦게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 ||
사실 지난 대선은 정권 교체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화학적 결합이 가능했지만 총선은 의원들 각자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 명분보다 ‘실리’를 보고 탈당할 의원들이 속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특히 박 전 대표가 “말로 해선 안 통한다”며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짐을 쌀 경우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이번 총선이 3자 구도로 바뀌면서 대통합민주신당의 어부지리 약진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나라당 공천 전쟁의 최악 시나리오를 따라가 보았다.
제18대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 안팎은 공천 문제로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그치지 않고 있다. 특히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이 친박그룹을 대거 물갈이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면서 여기저기서 괴소문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부산의 경우 김무성 서병호 의원, 경남 김학송 의원, 경북 최경환 김재원 의원, 대구 유승민 의원 등 당직을 맡은 인사들이나 박근혜 전 대표의 최측근 의원들 극소수만 살아남고 모두 궤멸할 것”이라는 악성 괴담도 떠돌고 있다. 이 때문에 겉으로는 당의 일방적 공천 일정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일부 친박 의원들의 경우 물밑으로는 이 당선인 측에 줄을 대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렇지 않고 거의 공천을 포기한 의원들과 일부 당협위원장들이 “그동안 말로만 탈당을 외쳐 늑대의 거짓말이 됐지만 이제는 뭔가를 보여줄 때”라며 박 전 대표를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친박그룹은 친이그룹의 대거 물갈이 계획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친박그룹 의원은 이에 대해 “친이그룹이 공천 같은 민감한 부분에 대해 공개적인 의견을 피력하며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당선인의 측근 이방호 사무총장이 “영남권 물갈이 비율이 35~40%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뒤 자신의 말을 부인한 것을 두고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 사무총장의 발언은 공천에 대한 이 당선인 측의 첫 번째 커트라인 공개라는 점에서 파문이 컸다. 이에 대해 당내에서는 “이 당선인 측이 친박그룹의 정치적 기반인 영남지역 의원들의 물갈이를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리고 영남권에 이어 수도권에 대한 물갈이 커트라인도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 이 당선인의 측근인 공성진 서울시당 위원장이 “이명박 후보의 당선으로 새로운 리더십의 시대가 출범하는 만큼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강세 지역인 서울 강남권에서도 쇄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남, 서초, 송파, 강동 등 한나라당 우세지역에서 ‘새로운 인물’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친박그룹 측은 “공천심사위원도 아닌 공성진 의원이 자격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가 있느냐” “공 의원도 강남을이 지역구 아니냐. 자신도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얘기하는 것이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당 일각에서는 공 의원의 발언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된 전략적 발언이라고 보고 있다. 먼저 이 당선인 자신이 강남권 지역구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선인은 최근 한 사석에서 ‘강남, 서초, 송파구가 어디 지역구냐, 전국구지’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강남권 의원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공 의원이 이 당선인의 의중을 받들어 파문을 무릅쓰고 공개적인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강남은 한나라당에게 상징적 지역이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곳이기 때문에 누가 공천을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당선인 측은 쉬운 지역에 더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겠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그만큼 자기개혁을 확실하게 하겠다는 명분이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는 한 가지 비수가 숨어 있다. 친박그룹 의원들 대부분이 당선되기 쉬운 지역 출신 아니냐. 최근에 나온 ‘영남·강남 물갈이론’은 개혁 공천을 명분으로 친박그룹을 모조리 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을 위시한 한나라당 내의 비주류가 한나라당의 주류였던 친박그룹을 완전히 제거하는 완벽한 권력이동을 의미하며 그것이 차기 대권까지 결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양측의 공천 전쟁은 파국 아니면 타협의 ‘올 오어 낫씽’ 게임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클라이맥스는 1월 24일 확정될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11명의 명단을 통해 폭발할 것이다. 양측은 공천심사위원장을 누구로 하느냐를 놓고도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당선인 측은 역시 중립적 인사 가운데 가급적 외부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방침인 반면 박 전 대표 측은 당내 인사 가운데 양측이 모두 중립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인사를 임명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사실상 공천권을 거머쥔 공심위 구성에서 타협이 되지 않을 경우 양측은 복잡한 경우의 수로 빠져들게 된다. 여기에는 공천의 ‘키’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명박 당선인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나오게 된다. 먼저 이 당선인이 끝까지 개혁 공천을 명분으로 3월 초 공천 일정을 강행할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양측은 브레이크 없이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의 형국이 된다.
이 당선인이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박 전 대표를 끝까지 압박할 경우 궁지에 몰린 박 전 대표가 전격 탈당을 선언한 뒤 독자신당을 창당할 가능성이 있다. 신당 창당이 여의치 않을 경우 탈당 뒤 이회창 전 총재의 ‘자유신당’에 합류해 공천 지분을 공유하는 경우의 수가 있다. 만약 박 전 대표가 극단의 선택을 할 경우 신당 창당보다는 ‘자유신당’ 합류가 더 유력한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 당선인 측과 협상을 통해 공천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전격 탈당해 신당을 창당한다면 여권 분열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인과 협상을 하다가 그것이 실패한 뒤 신당을 창당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 후보등록일(3월 25일) 전에 신당 창당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라며 자유신당으로 옮겨갈 경우 그 파괴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명박 당선인은 취임도 하기 전에 리더십에 상처를 입고 국정 운영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된다. 총선 또한 3당 구도 체제로 전개되면서 한나라당 후보와 박 전 대표-이회창 전 총재의 연합군인 자유신당 후보가 표를 나눠먹게 되면서 수도권 등지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들의 어부지리 당선이 속출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의 압도적 승리를 노리는 한나라당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이 당선인 측은 이런 경우의 수가 최악이라고 본다. 하지만 원칙을 강조해온 박 전 대표가 쉽게 당 문을 박차고 나갈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한편 박 전 대표 측은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뛰쳐나가 싸우다 죽겠다”며 ‘탈당 카드’로 이 당선인 측을 계속 압박한다면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탈당이 매우 부담스럽다. 여권 분열의 장본인으로 몰려 자칫 ‘제2의 민국당’으로 정치권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당에 남아 끝까지 투쟁하는 세 번째 시나리오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박 전 대표 측이 당내에서 투쟁할 때 들고 갈 ‘무기’가 뾰족한 게 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현재 친박그룹 내부에서는 “그동안 수도 없이 공천을 투명하게 하라고 말했지만 저쪽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시간만 허비했다. 이제는 집단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탈당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이 아닌 이상 박 전 대표 측이 이 당선인 측을 압박할 ‘무기’는 사실상 없다. 더구나 공천 시기가 예정대로 3월 초로 이루어질 경우 박 전 대표 측의 탈당 무기도 그 파괴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공천 시기가 박 전 대표에게는 가장 시급한 선결 과제다.
한편 이 당선인 측이 ‘탈당’을 무기로 덤비는 박 전 대표 측의 압력에 굴복해 양보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네 번째 경우의 수는 이 당선인이 대선 승리 뒤의 전리품을 박 전 대표 측과 공식적으로 나눠먹게 되는 ‘공천권 공유’를 들 수 있다. 사실 이 당선인 측이나 박 전 대표 측이 서로 갈라서게 될 경우 양측 모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1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국민적 선택을 무시하고 다시 분당으로 치닫게 되면 국민들이 총선에서 양쪽에 그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이 결국 ‘황금분할’로 지분을 나눠 가지는 대타협을 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여기에는 이 당선인이 끝까지 박 전 대표와 밀고 당기기를 해 최소한의 공천권만을 쥐어주는 일부 공유와 차기 정부의 원만한 국정 수행을 위한 당 차원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공천권을 대등한 수준으로 나누게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이 시나리오는 이 당선인 입장에서 보면 타협의 정치를 실현시켜 당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 당선인이 ‘포스트 강재섭’을 노리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 계보들을 설득해야 하는 장애물이 놓여 있다. 현재 이 전 최고위원 계보 의원들은 이번 총선을 통해 확실하게 당을 장악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이방호 공성진 의원 등 이 전 최고위원의 최측근들은 공개적으로 공천에 대해 말을 쏟아내며 여론몰이를 하는 인상을 주는 것도 그런 사고의 연장선상 때문이다.
이 당선인으로서는 이 전 최고위원의 혁혁한 공 때문에 대권을 쟁취하긴 했지만 이제는 국정 통수권자로서 이전과는 다른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이 당선인은 당분간 국정 운영과 당의 안정을 위해 박 전 대표와 ‘반드시’ 협력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전 최고위원 입장에서는 오로지 당권 장악이 최우선 목표다. 이는 예전 동지였던 두 사람의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이다. 최근 이 당선인이 총리직을 두고 박 전 대표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도 이런 이해관계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전문가는 “이재오 당선인은 당이 완전히 이 전 최고위원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당을 완전하게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수위원장 자리를 놓고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이 당선인과 두 시간 동안 논쟁을 벌이며 반대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것에서 그 첫 번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두 사람 간의 토론이긴 했지만 당 안팎에서는 이 전 최고위원의 정치적 성향상 결코 호락호락하게 청와대 거수기 역할에 그치진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 전 최고위원으로서는 때때로 청와대와 맞서는 파격도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당선인이 박 전 대표에게 일정한 지분과 자리를 주면서 이 전 최고위원을 견제하려고 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공천을 앞두고 벌어지는 한나라당의 싸움이 단순히 친이와 친박의 대결을 넘어 복잡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