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능란한 공수 ‘여유’…문, 집중 공격에 ‘진땀’
TV 토론이 선거 결과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일요신문 DB
지난해 10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TV토론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둘은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었고, 방청객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해야 했다. 트럼프는 힐러리가 발언하는 동안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원고가 없는 스탠딩 토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미국 유권자들이 열광했던 스탠딩 토론은 각종 시청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대한민국에서도 사상 첫 스탠딩 토론이 펼쳐졌다. 4월 19일 열린 <2017 대선후보 KBS 초청 토론회>에서 5개 정당 대선후보들은 원고 없이 단상에 선 채 2시간 동안 격론을 벌였다. 시청률도 ‘대박’을 쳤다. 이날 시청률은 26.4%(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4월 13일 1차 TV토론 때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처음 실시된 스탠딩 토론이라는 점에서 유권자들 눈과 귀가 쏠렸던 것으로 풀이된다.
2차 TV토론은 숱한 뒷말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주적 논란’이었다. ‘문재인 저격수’를 자처한 유 후보는 작심한 듯 문재인 후보를 향해 “문 후보님. 북한은 우리의 주적입니까”라고 질문했다. 문 후보 안보관 문제를 지적해왔던 유 후보 일격이었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문 후보는 “대통령 될 사람이 언급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응수했다. 유 후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문 후보 발언을 중간에 끊고 “아직 대통령 되기 전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문 후보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렇게 강요하지 마세요. 유 후보도 마찬가지로 대통령 되면 남북관계 풀어가야 할 입장이에요”라고 했다.
토론 후 여진은 만만치 않았다. 정치권은 이를 두고 장외 설전을 벌였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며 문 후보를 향해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이에 민주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북한을 주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색깔론적 정치공세”라고 반박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햇볕정책과 관련해 설전을 벌였다. 홍 후보가 미소 띤 표정으로 “햇볕정책을 계승하신다구요. 안 후보님”이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안 후보는 “공과 과가 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홍 후보는 “아니, 햇볕정책을 본인이 계승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에 대한 입장을 물으면서 안 후보 ‘안보관’을 공격하려는 전략이었다.
안 후보는 “100% 옳거나 틀린 것은 없습니다. 대화를 통해 평화를 해결하는 방향에 대해서 동의합니다”라며 답변을 이어갔다. 하지만 홍 후보는 안 후보가 답변을 마친 뒤 “예, 그래서 집권하시면 (말 막으면서) 북에 달러 제공해야겠네요”라며 비아냥거리는 발언을 했다. 홍 후보는 “햇볕정책과 대북송금 특검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며 안 후보를 토론 내내 몰아세웠다.
홍 후보는 얼마 전 곤욕을 치렀던 이른바 ‘설거지 발언’으로 심상정 후보에게 공격을 당했다. 안 후보가 “홍 후보님이 얼마 전 ‘설거지는 여성의 몫입니다’라고 했는데 너무 심한 여성비하발언입니다. 사과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에 홍 후보는 “스트롱맨이라 세게 보이려고 그런 이야기를 했죠. 실제로 집에 가면 설거지를 다 합니다”라며 웃었다. 그러자 유일한 여성 주자인 심 후보는 흥분한 목소리로 “웃어넘길 일 아니에요. 여성을 종으로 보지 않으면 그런 말씀은 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사과하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홍 후보는 “그것을 사과하라고 합니까. 웃으라고 한소리입니다. 센 척하느라 한소리인데…”라며 굽히지 않았다. 유 후보 역시 “설거지하고 빨래 안 하는 것이 스트롱인가요”라고 심 후보와 함께 홍 후보를 협공했다. 결국 홍 후보는 “말이 잘못됐다면 사과하겠다”라고 한 발 물러섰다.
5명의 후보가 한꺼번에 ‘물고 물리는’ 난타전을 벌이는 장면은 이번 스탠딩토론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홍 후보는 “안 후보는 선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참 오락가락 하십니다. 사드배치도 한다 안 한다, 햇볕정책도 계승한다 안 한다, 촛불 때도 오락가락했다. 지도자가 되면 결단 결기가 중요한데 오락가락해서 지도자가 되겠습니까”라고 안 후보에게 화살을 날렸다. 당사자인 안 후보는 “그것이야말로 왜곡입니다. 저만큼 결단의 시간을 보낸 사람 없을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둘의 공방이 끝나자마자 심 후보가 나섰다. 그는 유 후보의 전술핵 한반도 재배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재배치한다는 것입니까.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원칙을 확인했고, 미국 러시아 국방장관회담에서도 확인됐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유 후보는 “집단안보든 한미동맹이든 뭐가 중요합니까. 우리 국가안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토론 초기 유 후보는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하면서 문 후보의 안보관 문제를 지적했었다.
토론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안 후보를 공격했던 홍 후보는 이번엔 문 후보를 향해 칼을 빼들었다. 홍 후보는 “문 후보는 우리나라 선거 연령을 낮춰야 한다며 북한의 선거연령 17세 인하를 예를 들었다. 북한에 선거가 있습니까. 선거는 없습니다”라고 공격했다. 문 후보는 “또 색깔론으로…”이라고 답했다.
이번엔 유 후보가 끼어들었다. 타깃은 홍 후보였다. 유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당원이지만 당원권이 정지됐다. 원래 당규대로면 홍 후보는 출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특별 조치로 당권을 회복해서 대선후보에 출마했다. 앞뒤가 맞지 않다”고 공격했다. ‘성완종 게이트’로 재판을 받고 있는 홍 후보 자격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에 홍 후보는 “이정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주적은 저기예요”라며 문 후보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난 대선 때 이정희 통합민주당 후보는 “박 전 대통령을 떨어뜨리려 나왔습니다”라며 박 전 대통령을 공격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동정론이 일면서 오히려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이 후보가 ‘팀킬’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홍 후보가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는 유 후보를 향해 섭섭함을 토로하는 장면이었다.
토론이 끝난 뒤 후보들 평가는 엇갈렸다. 차재원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승자로 유 후보를 꼽았다. 차 교수는 “유 후보가 준비가 상당히 잘 돼 있었다. 토론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경제학자 출신이기 때문에 정책과 관련된 수치를 다뤄 본 경험이 그대로 묻어났다. 공격 포인트를 제대로 짚고 어떻게 공격해야 자신이 유리한지를 알고 있었다. 특히 주적이나 국민연금 소득 대체율 문제를 거론한 점은 문 후보에겐 아픈 대목이다. 다른 후보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도 질문을 하지 못했지만 유 후보는 거침없었다. 유 후보는 수비도 잘했다. 축구로 예를 들면 상대의 길목을 잘 막고 공격 루트를 적절히 차단할 줄 아는 선수였다”라고 평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도 유 후보에 높은 점수를 줬다. 채 교수는 “일단 유 후보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양강 구도를 형성한 문재인 안철수에 비해 부담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욱 자유로워 보였다. 문 후보는 1등 주자다. 공격수는 많고 방어를 혼자 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지만 유 후보는 부담이 없다. 유 후보는 유리한 위치 선정으로 시간을 나눠 쓰면서 상대 후보들의 약점을 적절히 공략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문 후보가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라고 입을 모았다. 차 교수는 “문 후보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다른 후보들의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대비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국민연금 문제 등에서 공격이 들어오자 수세에 몰렸다. 감정적이고 짜증스럽게 대답하는 부분이 많았다. 평소 문 후보 강점인 여유가 사라졌고 특유의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채 교수도 “문 후보를 향한 공격이 많았다. 상대 후보들로부터 집단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해명하고 방어하는데 역부족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문 후보가 공격은 못하고 해명하는데 시간을 써버려서 정작 본인의 비전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코너에 몰린 인상을 줬다”라고 설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각종 이미지 득실 “홍 ‘아재’ 연상…손가락질 불쾌” 1961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케네디 민주당 후보와 닉슨 후보 간 TV 토론회가 열렸다. 부통령이었던 닉슨 후보가 대세였고, 케네디 후보는 정치 초년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지도가 약했다. 하지만 닉슨 후보는 토론회 내내 땀을 흘리거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닉슨의 ‘노회한 이미지’는 케네디의 젊은 이미지와 대비됐다. 케네디의 잘생긴 외모와 당찬 목소리는 미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결국 미국 대선 최종 승자는 케네디였다. 대선 TV토론은 ‘이미지’ 승부다.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도 중요하지만 실시간으로 노출되는 이미지도 당선 열쇠를 쥐고 있다. 손짓과 목소리 등 비언어적인 ‘이미지’가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후보들이 TV토론을 앞두고 스피치 전문가 등을 영입해 사전 연습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4월 19일 2차 토론을 지켜본 정연아 이미지컨설턴트 회장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물을 마시면서 계속 소리를 냈다. 마치 ‘아재’와 같은 이미지였다. PPT 발표할 때도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다.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하는데 훈련을 안 하고 나온 모습이었다. 홍 후보는 아래 사람한테 지시하듯, 죄인을 취조하듯 손가락질 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다. 시청자들은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치명적인 불쾌감을 가져올 수 있다”고 꼬집었다. 강진주 퍼스널이미지 연구소 소장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토론 매너가 인상적이었다. 다른 후보들은 옆에 있는 후보와 토론할 때 반대편으로 고개만 돌아갔다. 하지만 유 후보는 고개뿐만 아니라 어깨도 동시에 돌아갔다. 상대 후보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려는 적극적인 모습이다. 질문도 단문 형식이라서 국민들이 ‘이게 무슨 말이구나’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한 점도 칭찬해주고 싶다”고 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베스트 드레서’로 뽑혔다. 정 회장은 “심 후보는 옷으로 약점을 잘 보완했다. 심 후보 약점은 강하고 다소 투쟁적인, 강성 정치인 이미지라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어려워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토론 당일 심 후보는 빨간색 정장에 노란색 세월호 리본을 달고 나왔는데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빨간색은 안정감 있고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색이다”라고 평가했다. ‘워스트 드레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였다. 강 소장은 “안 후보의 넥타이 색깔이 유독 신경 쓰였다. 1차 TV토론 때 안 후보는 진한 단색의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시청자들의 눈이 넥타이로 쏠려 안 후보의 피곤한 표정이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안 후보의 넥타이는 연한 연두색이었다. 안 후보의 피곤한 표정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라고 지적했다. [선] [민] |
양강구도 균열 조짐? “안 거품 빠진 것…확대해석 금물” 2012년 18대 대선 직후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의뢰로 한국정당학회가 실시한 ‘18대 대선후보 TV 토론회 효과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 96.7%가 TV토론을 1회 이상 시청했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 지지자 중 5.6%, 문재인 후보 지지자 중 9.6%가 TV토론을 시청한 뒤 지지 후보를 바꿨던 것으로 나타났다. TV토론 전후 지지율 비교는 토론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4월 13일 열린 1차 대통령 후보 토론 이전까지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하지만 TV토론 직후 이 구도에 균열을 알리는 각종 여론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1차 TV토론 당일과 익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5자 가상대결에서 문 후보(44.8%)는 안 후보(31.3%)에 오차범위(±3.1%p) 밖인 13.5%p 앞섰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10.3%), 심상정 정의당 후보(3.5%),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3.2%)가 뒤를 이었다. 안 후보 지지율은 4월 1주차 주간동향 대비 2.8%p 떨어졌고 문 후보 지지율은 2.6%p 올랐다(이번 조사는 13~14일 이틀간 전국 성인 1021명을 대상으로 실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이며 응답률은 9.8%. 자세한 조사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4월 19일 2차 TV 토론 이후에도 이러한 양상은 계속됐다. <한국갤럽>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 따르면 문 후보(41%) 안 후보(30%) 홍 후보(9%) 순이었다. 안 후보 지지율은 지난주 대비 7p%p 하락했고 문 후보 지지율은 1%p 상승했다(이번 조사는 18~20일 4일간 전국 성인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응답률은 25%). 물론 전문가들은 “확대해석은 금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차재원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안 후보에게 지지를 보냈던 보수층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TV 토론 영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변수가 없는 한 양강 구도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 역시 “안 후보는 반문정서로 인한 반사이익에 기대왔다. 자신의 지지율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네거티브가 빗발치면서 일시적으로 거품이 빠졌다. 전적으로 2차 TV 토론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했다. [선] [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