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청구서 들여다보니 ‘무죄’ 증거 수두룩…“여성 피해자 사인, 다른 데 있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한 엄궁동 2인조가 지난 5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접수했다. 이날 박준영 변호사(오른쪽) 엄궁동 2인조(가운데), 약촌오거리 사건에서 진범을 검거했던 황상만 전 형사반장, 홍강철 씨, 지난 4월 재심 개시가 결정된 ‘충주 귀농부부 사건’의 박 철, 최옥자 씨가 함께했다.
지난 8일 오후 3시, 부산지방법원 앞. 두 남자가 법원 문을 열었다. 힘겨운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문이었지만, 그들이 느끼는 문의 무게는 다른 이들이 느끼는 그것과는 다른 듯했다. 26년 전, 그들은 이 법원에서 유부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날 엄궁동 2인조가 접수한 재심청구서에는 그들이 다시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다. A4용지로 총 328장, 증거자료와 각종 첨부자료 등을 더하면 2000장에 달하는 분량이다. 1991년부터 허공에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외치던 두 남자는 이제 재심청구서를 들고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앞서 엄궁동 2인조는 총 세 가지 사건으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1989년 12월 새벽 부산 사하구 신평동 강변도로에서 현직 경찰관을 상대로 벌인 강도 감금 사건 △1990년 1월 4일 새벽 부산 엄궁동 부녀자 강간살해 사건 △1991년 11월 6일 공무원사칭 사건이다. 엄궁동 2인조의 당시 사건 수사 기록을 보면, 이들은 1991년 공무원사칭 혐의로 부산 사하경찰서에 임의동행 했다가 여죄를 추궁 받는 과정에서 현직 경찰관 강도 감금사건, 엄궁동 부녀자 강간살해 사건을 자백했다.
1991년 11월 공무원 사칭 혐의로 부산 사하경찰서에 임의동행한 엄궁동 2인조는 사흘 만에 현직 경찰 강도감금,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됐다.
# 수사 기록 대부분이 허위‧조작
엄궁동 2인조 사건의 재심청구서는 앞서의 세 가지 사건이 두 남자와 관련 없거나 조작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당시 경찰 수사 과정과 절차상의 위법행위와 당시 재판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들이다.
이 가운데 엄궁동 2인조의 변호인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에서 경찰의 절차상 위법행위에 주목했다. 그는 “새로운 증거가 없었더라도 재심 청구가 가능할 만큼 당시 수사 경찰의 위법행위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재심청구서에서 확인되는 절차상 위법행위는 크게 허위공문서 작성, 불법체포, 불법감금, 위법한 목적의 별건구속 등으로 나뉜다. 모두 형사소송법 위반이다. 엄궁동 2인조 사건의 발단이 된 공무원사칭 사건을 보면, 최초 피해자 진술 조서부터 허위·과장 작성됐다. 재심청구서를 보면, 지난 4월 박 변호사가 직접 만난 공무원사칭 사건 피해자 A 씨는 박 변호사가 보여준 자신의 진술조서를 보고 “사건 발생 당일의 정황 등이 대부분 잘못 적혀있다”며 자필로 진술과 다르게 기재된 부분을 다시 적었다.
그가 잘못됐다고 표시한 부분은 피해자와 2인조의 이름, 사건발생 장소 등을 제외한 전부다. 특히 진술조서에는 A 씨가 경찰서에서 엄궁동 2인조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으로 기재돼 있지만, A 씨는 단 한 번도 두 사람을 경찰서에서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공무원사칭 사건의 피해자 A 씨는 자신의 진술조서가 모두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자필로 수정했다.
이 같은 진술서, 자술서 등의 허위 작성은 공무원사칭 사건 이후 조사된 현직 경찰 강도 사건, 엄궁동 살인사건 조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직업이 있는데도 ‘무직’으로 기재하는 것부터, 강도나 살인 등 핵심 내용만 제외하고 모두 현장 상황과 맞지 않거나 증거가 없다.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과 항소심 대법원 재판부가 의미 있게 본 ‘증거’는 ‘피해자’들의 진술과 엄궁동 2인조의 자백 두 가지다. 재심청구서는 이 자백과 진술들이 대부분 허위로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수사기록을 보면 피해자들의 진술은 현장 상황과 엄궁동 2인조의 자백과 상반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같아지는 등 곳곳에서 모순이 발견된다. 반면 당시 재판부는 “2인조가 자백했다”는 이유만으로 앞서의 정황 등을 재판과정에서 모두 제외했다.
# “일단 잡아 두고 조사했다”
절차상 위법한 행위, 불법체포 등은 지난 4월 박 변호사와 만난 수사 경찰이 인정했다. 재심청구서 녹취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직접 검거를 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수갑을 채웠어요 둘 다.”라며 “…그때는 우리가 미란다 원칙 고지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어요. 그냥 이름 부르면서 와봐라 이래가지고 그래, 내 어디에 있는 형사인데 잠깐 경찰서까지 가서 뭐 물어볼 게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임의동행을.” 이는 형사소송법 201, 206, 207, 209조 위반이다.
구속 과정과 내용에도 경찰의 절차상 위법행위가 발견된다. 구속영장청구 당시 19건의 공갈사건이 범죄사실로 적시됐는데, 앞서의 A 씨 사건을 제외하면 피해자 조사는 물론, 신고조차 없었다. 범죄일람표를 보면 범행일시 및 장소, 피해자, 범행수단 및 방법 등이 특정된 사건이 단 하나도 없다. 날짜는 ‘중순, 초순’ 피해자와 피해차량은 ‘일체불상’ 등으로 모두 추상적이고 일률적으로 기재돼 있다.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수사기록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위법한 별건 구속은 혐의점이 없는 데도 ‘일단 구속한 뒤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사기록을 보면, 공무원사칭 혐의로 구속된 2인조는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아무런 혐의점이 없는 데도 강도, 살인 등의 다른 사건의 조사를 받았다.
재심청구서는 당시 수사 경찰의 절차상 위법행위가 있었음에도 엄궁동 2인조가 ‘자백’을 했던 이유로 ‘고문’을 꼽는다. 당시 사하 경찰서 유치장에 함께 수감돼 있던 세 명의 수감자들의 증언이 그 근거다. 26년간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던 이들은 최근 박 변호사와 만나 엄궁동 2인조의 고문에 대해 모두 공통된 증언을 했다(일요신문 2017년 2월 23일 보도). 당시 수사 경찰 역시 “선배가 고문하는 걸 봤다”는 등의 증언을 하기도 했다.
엄궁동 2인조가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접수하고 있다.
# 무죄 입증할 새로운 증거
엄궁동 2인조의 무죄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는 엄궁동 부녀자 강간살인 사건에 집중돼 있다. 당시 수사기록과 부검기록을 보면, 엄궁동 2인조는 피해자 B 씨를 각목으로 안면부 2회 강타, 주먹크기만한 돌로 우측 전두부분 1회 강타해 우측 전두부 15cm 넓이의 두피파열, 두개골 노출, 13cm 넓이의 두개골 분쇄골절로 두부변형 등으로 숨지게 했다고 기재돼 있다.
그러나 수사기록을 검토한 전문가는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재심청구서에서 이호 전북대학교 법의학 교수는 “주먹크기만한 돌로는 이런 상태를 만들 방법이 없고, 두 손으로 겨우 들 수 있는 물건으로 내리찍었을 때 피해자의 상태와 같은 함몰과 분쇄골절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그는 또 “각목으로 안면부를 가격하면 두피가 찢어질 수밖에 없는데, 해부소견에 각목으로 2번 때렸다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자백에도 없고, 당시 경찰이 작성한 수사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사인(死因)이 새롭게 발견되기도 했다. 이호 교수는 ‘목을 절개했을 때 목 앞쪽으로 광범한 피하출혈이 있었다’는 부검소견, 목 부위 쓸린 상처가 찍힌 사진을 토대로 “피해자 B 씨의 두개골 가격 이전에 경부압박(목졸림)이 분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B 씨의 부검 전 모습이 촬영된 여러 사진을 보면, 목 부위에 쓸린 흔적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B 씨가 외부 충격으로 사망한 게 아니라, 목졸림으로 먼저 사망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엄궁동 2인조의 자백에도, 경찰 및 검사 작성 조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강한 외력이 작용해 두개골 함몰 등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 목 졸림에 대한 언급은 없다.
피해자 B 씨를 유기한 정황도 과학적 분석 결과와 다르다. 수사기록을 보면, 엄궁동 2인조가 각각 숨진 B 씨의 어깨와 다리 부분을 안고 갈대숲으로 내려왔다고 기재돼 있다. 그러나 부검감정서를 보면 등에 41 × 30cm 넓이의 다발성 찰과상이 있고, 부검 전 사진에서도 등 위쪽부터 광범위한 찰과상이 확인된다. 반면 엉덩이, 허리, 다리 부분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다.
또한 검증조서를 보면, B 씨는 발견 당시 상의와 속옷이 목까지 말린 상태로 양팔을 머리 위까지 모은 채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이는 ‘한 사람이 다리를 잡고 끌고 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는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가 지난해 9월 사건 현장에서 직접 실험한 결과이기도하다. 그러나 엄궁동 2인조의 자백 어디에서도 “다리를 잡고 끌고 갔다”는 진술은 나오지 않는다.
수사기록에는 엄궁동 2인조가 각각 숨진 피해자 B 씨의 어깨와 다리를 끌어안고 갈대숲으로 이동했다고 기재돼 있다. 그러나 부검사진과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엄궁동 2인조 가운데 한 명인 장 씨의 시력과 관련한 자료도 새롭게 발견됐다. 장 씨는 시신경위축 질환을 앓고 있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재심청구서에 첨부된 장 씨의 과거 사진들을 보면, 그는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과 달리 카메라 렌즈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수사기록을 보면, 장 씨는 달도 뜨지 않고 가로등도 없는 갈대숲에서 숨진 피해자 B 씨와 함께 있던 남성과 물속에서 격투를 했고 감금을 한 뒤, B 씨를 돌로 쳐 살해했다고 기재돼 있다. 여기에 사건 현장에서 자택까지 8km에 달하는 거리를 혼자 걸어간 것으로 작성돼 있다. 그러나 장 씨는 1979년 6월 앞서의 시신경 위축 증상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사실이 확인 됐다(일요신문 2016년 7월 1일 보도). 사건 발생 20여 년 전부터 이 증상이 확인돼 있던 것이다. 이 병적증명서는 앞선 재판과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재심청구서에는 앞서의 현직 경찰관 강도감금 사건에서의 새로운 증거도 포함돼 있다. 피해 경찰관은 경찰 조사와 법정 증언에서 사건 발생 당시 타고 있던 차량을 ‘대우 르망’이라고 진술했는데, 국토교통부 협조를 통해 차량 번호를 조회한 결과, 그 차량은 르망이 아닌 ‘현대 스텔라’였다. 그밖에 재심청구서에는 또 다른 경찰 수사 과정과 절차상의 위법행위 새로운 증거, 과거 증거들의 모순점, 고문 증거 등이 포함돼 있다.
박 변호사는 향후 재심보충서를 통해 추가 증거와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 더 있다는 얘기다. 그는 “올해 재심 개시를 목표로 재판부에 보충 자료를 지속적으로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엄궁동 2인조 사건 재심 청구 준비는 지난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면서부터 시작됐다. 2013년 두 남자가 감형돼 출소한 지 3년 만이다. 지난해 3월 26일, <일요신문>은 엄궁동 2인조의 사건 수사 기록과 삼례3인조, 약촌오거리 사건의 재심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의 의견을 토대로 당시 수사 경찰의 조작 정황을 보도했다.
같은해 10월 방송된 SBS <그것이알고싶다> ‘자백과 고백, 그리고 거짓말-엄궁동 2인조 사건의 진실’ 편에선 두 남자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들이 발견됐고, 박 변호사는 당시 경찰 수사 과정과 절차에서 심각한 위법 행위를 확인했다. 이후 사건 발생 당시 두 남자의 변호인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방송과 공식석상 등에서 이 사건에 대해 “변호사를 35년 하면서 가장 한이 남는 사건”이라고 언급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