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친 뒤 ‘도피유학’ 지난해야 불거져 ‘시끌’
▲ 지난 4일 고이즈미 총리가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며 그의 정치 도박은 또 한번 성공했다. 로이터/뉴시스 | ||
고이즈미 총리는 1942년 가나가와 현의 요코스카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로부터 3대째 내려오는 정치가 집안으로,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건설업을 하는 집안에서 정치계에 입문해 우정장관까지 지냈다. 당시 건설업은 야쿠자의 아래에서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이즈미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조부인 마타지로는 온몸에 용의 문신이 있어 ‘문신 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마타지로는 매우 대담한 인물로 고이즈미 총리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야는 실은 아들이 아니라 사위로,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고이즈미 집안에 양자로 들어오게 됐다. 고이즈미 준야 역시 정치가로, 현재의 자민당을 만든 중심인물 중 한 명이다.
이처럼 유서 있는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난 고이즈미는 가나가와의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를 거쳐 1962년 게이오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지만, 1969년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일본에 돌아오게 된다. 2년간의 영국 유학기간 동안 학점은 전혀 취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들이 그 이유에 대해 질문하자 고이즈미 총리는 “학점을 취득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대답했다. 더구나 고이즈미가 대학시절 여학생을 강간한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아버지가 런던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지난해 한 저널리스트는 “고이즈미는 성폭행 전과가 있으면서도 총리직에 앉아 일본 국민에게 굴욕을 줬다”며 위자료 1백만엔(약 9백만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고이즈미는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재판부는 강간은 친고죄인 데다 증거도 없고 시효도 이미 끝났기 때문에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현직 총리의 강간혐의 스캔들은 국회에서 거론될 정도를 큰 화제를 모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고이즈미는 아버지의 선거구인 요코스카를 이어받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정치가로서의 처세술 등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는 패배였다. 더구나 아버지를 도와줬던 후원자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도 패인의 하나였다.
첫 선거에서 패한 후 고이즈미는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후쿠다 다케오의 집으로 들어가 비서를 지내며 정치를 배운다. 후에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지내게 되는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 후쿠다 야스오(당시 33세)도 이곳에서 알게 된다.
젊은 고이즈미는 후쿠다 다케오 밑에서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밟아나간다. 1978년에는 후쿠다의 소개로 유명 제약회사 창립자의 손녀인 미야모토 가요코를 만나게 된다. 당시 대학생이던 미야모토 가요코는 고이즈미보다 열네 살이나 어렸다. 여대생과 국회의원의 결혼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으며 두 사람은 1978년 1월 화촉을 밝힌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가요코는 정치가의 아내이며 동시에 두 아이의 어머니였고, 대가족의 며느리였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곧바로 아이를 낳은 그녀가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1982년에 합의이혼하게 된다. 이혼 사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고이즈미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얘기도 있고, 고이즈미 총리의 누나인 노부코의 엄청난 치맛바람과 시집살이에 견디지 못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고이즈미보다 네 살 위인 노부코의 존재는 그에게 절대적이었다. 지금의 고이즈미 총리는 누나가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미지 메이킹부터 말이나 행동, 취미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심지어 고이즈미의 전매특허인 ‘사자갈기머리’도 누이의 작품이라고 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혼 후 이렇다 할 스캔들 없이 쭉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데, 본인은 이에 대해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총리가 되기 전까지 아카사카의 유명한 게이샤와 깊은 관계였다는 얘기는 정가에서 꽤 유명하다.
상대는 아카사카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샤인 긴카(35).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 이야기가 그동안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것은 손님의 일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 게이샤의 규칙 때문이다.
고이즈미와 긴카가 만난 것은 그녀가 아직 견습생이던 23~24세 때. 두 사람이 깊은 관계가 된 것은 긴카가 27세 때의 일이다. 나이차가 27세나 됐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고이즈미가 총리가 될 때까지 6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2001년 총리에 취임하게 된 고이즈미는 긴카에게 “잠시 형무소에 다녀올 테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에 긴카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두 사람 모두 고이즈미 총리가 역대 총리 중 세 번째로 장기집권하는 총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긴카의 지인은 “두 사람은 총리 취임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고이즈미가 자주 전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마저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긴카는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거짓말로 이별을 통보했다. 고이즈미는 “너의 인생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즈음 고이즈미 총리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오른손이 애인”이라든지 “매일매일이 금욕”이라는 등의 발언을 해서, 긴카에게 “나에게는 너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긴카와 헤어진 후로 고이즈미 총리에게 이렇다 할 스캔들은 없다. 자민당 간부와의 회식자리에서 “요즘 몽정을 한다”는 농담을 건넬 정도라고 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윈스턴 처칠. 두 인물 모두 굽히지 않는 의지로 새로운 시대를 연 ‘개혁자’로, 고이즈미 총리는 그들의 모습 위에 오늘날의 자신을 오버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