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입·언론통제·여론조작 정황…“MB와 원세훈 간 밀약·지시여부 조사해야”
그런데 수십 년 전 옛날 얘기일 것 같았던 ‘국정원의 감춰진 스토리’가 또다시 불거져 나왔다. 언론통제 여론조작 등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국정원의 불법적 행태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 과정에서 최근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원 대수술을 예고하고 있다.
‘원세훈 녹취록’이 공개됨에 따라 국정원을 겨누고 있는 칼끝이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까지 향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이 전 대통령과 원 전 국정원장. 사진=청와대
# 원세훈 녹취록 증거 제출
7월 24일 검찰은 18대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2015년 7월 대법원이 일부 증거의 증거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2심 판결을 돌려보낸 지 2년 만에 파기환송심 재판 심리는 일단 마무리됐다. 법원은 8월 30일 선고를 내리기로 했다.
원 전 원장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심리전단국 직원들을 동원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 게시판 등에 댓글을 남기는 등 여론 형성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보고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으나 2심은 선거법 위반까지 유죄로 판단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대법원은 2015년 7월 2심 판단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원 전 원장은 파기환송심 과정에서 보석으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재판부는 검찰이 새 증거로 제출한 ‘SNS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 등 국정원이 작성한 13건의 문건과 국정원에서 최근 회신 받았다는 ‘전 부서장 회의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했다. 전 부서장 회의 녹취록은 2013년 수사 때 국정원이 검찰에 자료를 내며 삭제했던 대목의 상당 부분을 복구한 새로운 자료다. 검찰의 구형이 있었던 24일 법정에서 공개됐다.
검찰은 “이들 증거는 2012년 대선 당시 선거운동의 목적성이나 국정원법 위반, 정치관여 고의와도 직접 관련된다”고 했다. 검찰 설명대로 증거로 채택된 자료에는 국정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충격적 내용이 들어있었다.
#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
회의록에 따르면 국정원 부하 직원들에게 정치·선거 중립을 누차 강조해왔다는 원 전 원장 측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내용이 잔뜩 들어있다. 원 전 원장이 국정원을 보수 진영 교두보로 만들려는 시도를 통해 국내정치에 개입한 것은 물론, 언론통제와 여론조작 기관으로 국정원을 만들어간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2009년 6월 19일자 부서장 회의 녹취록을 보면 원 전 원장은 국내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발언을 한다. “내년 11월 지자체 선거가 11개월 남았는데 우리 지부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의원 후보들을 잘 검증해서 어떤 사람이 도움 될지”라고 말한다. 이어 원 전 원장은 “본인들이 안 나간다고 해도 나가라고 해서 시의원·구의원 나가고, 95년에도 시의원·구청장도 본인이 원해서 민자당 후보로 나간 사람은 없고 국정원에서 다 나가라고 해서 한 것”이라는 말도 한다.
2011년 11월 18일 녹취록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그해 진행된 10·26 재보선에서의 여당 참패를 안타까워하며 2012년에 있을 총선과 대선에 대응하자는 취지로 얘기한다. 그는 “선거 자체 결과를 바꿀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내년도(2012년)에 큰 선거가 두 개나 있는데, 그 선거나 이런 걸 볼 때 정확한 사실, 그러니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해서 선거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은 우리 원이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이에요”라고 했다. 국정원이 선거에 적극 개입하고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2012년 총선과 관련해 원 전 원장은 11월 18일 발언에서 인물 발굴 작업에 관한 주문도 한다. 원 전 원장은 “여러 인물이 발굴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보수가 결집하면 이길 교육감 선거도 분열 때문에 졌다. 지금부터 대비해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신경 쓰자”고 한다. 이어 “지금은 현 정부 대 비정부의 싸움이거든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12월부터는 예비(후보) 등록도 시작하지요? 그러니까 지부장들은 현장에서 교통정리가 잘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챙겨줘요”라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원 전 원장은 “우리는 항상 ‘우리가 했다’고 확인 안 하면 확인 안 되도록, 꼬리를 안 잡히는 게 정보기관”이라고도 한다. 보안 유지에 유념하라는 의미로 보인다.
# 언론, 잘 못하면 줘 패야
원 전 원장은 2009년 12월 18일 회의에서 보안 문제를 언급하며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 나가면 어떻게 죽이려는 걸 생각해야지, 기사가 났는데 다음 보도를 차단시키겠다? 이게 무슨 소리야”라며 직원들을 질책한다. 그는 또 “기사 나는 걸 미리 알고 기사를 못 나가게 하든지 안 그러면 기사 잘못 쓰고 그런 보도 매체를 없애버리는 공작을 하든지, 그런 게 여러분이 할 일이지 이게 뭐냐”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원 전 원장은 “잘못 할 때마다 줘 패는 게 정보기관이 할 일이지 그냥 가서 매달리고 어쩌고 하면 안 된다”고도 말한다.
2011년 11월 18일 회의에서도 기사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지시한다. 원 전 원장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처리를 두고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과 관련, “지금부터 칼럼이고 신문 곳곳, 방송이고 어디고 가서 다 준비했다가 그날 ‘땅’하면 아침 신문 조간에 실리도록 준비하는 치밀함이 있어야 하는데 원장이 이야기 안 하면 생각을 안 하고 있잖아요”라고 한다.
원 전 원장은 부서장들을 모아 둔 자리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여론전도 강조했다. 2009년 12월 18일자 회의록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심리전단 같은 데서 심리전도 하고 해서 좌파들이 국정을 발목 잡으려는 걸 차단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2011년 11월 18일 회의에선 “(국책사업에 대해) 우리가 의견을 잠깐 붙여 놓으면 해명서가 된 상태에서 펴지는데, 한마디 말만 하면 누가 믿느냐. 국사편찬위원장이나 교과부 장관 명의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 우리가 실어 날라주라 이거야. 그런 구체적인 방법도 생각하며 싸워야 한다”고 방향성을 알려준다.
원 전 원장은 심리전단이 북한의 대남 선전 선동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강조해 왔지만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뒤엎는 발언도 나왔다. 원 전 원장은 2012년 4월 20일 회의에 “심리전이라는 게 대북 심리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 꽤 중요해요”라고 강조한다.
# 각종 단체 활동에도 개입 정황
2009년 6월 19일자 회의록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보수 단체에 대한 운영비 지원 문제도 다시 재검토하세요. 좌파 정권이 없어졌는데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으면 뭐야. 자유총연맹이라든가 이런 데는 다 사무실 제공해주고 그랬어요”라고 한다. 그해 10월 회의에서도 “탈북자 단체를 만드는 데 있어 건전단체 먼저 만들어서 우리가 지원을 좀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국정원이 우군 확보 차원에서 각종 단체 지원에 앞장선 정황인 셈이다.
국회나 노조 활동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2010년 3월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은 “4월 국회 때는 지방행정구획 개편법이 확실히 정리되도록 해야 한다. 4월 국회에 안 되면 6월엔 원 구성한다 해서 7, 8월을 넘어가 버린다. 양당이 또 전당대회 하면 정기국회 이후 아무것도 못 할 수 있다”고 한다.
노조 문제와 관련, 2009년 9월 회의 석상에서 “현대차 노조위원장 재투표하게 됐지만 민노총이나 전교조, 공무원 노조 같은 문제도 하나의 중간 목표가 될 수 있다. 밑으로 내려가면 하나하나 회사 노조 이런 것도 우리가 관여하는 게 있지만은 그런 걸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그건 안 건드리는 것만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조 개입을 시사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 국정원 넘어 MB로 향할까
국가정보원에 대한 수술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조직쇄신 TF는 정보보안국과 정보분석국을 폐지하는 방안을 사실상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문제를 담당하는 2차장 산하의 두 부서는 국내 정치·경제·사회 등 분야별 정보를 매일 모으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불개입을 천명한 문재인 대통령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원세훈 녹취록이 공개됨에 따라 국정원을 겨누고 있는 칼끝이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까지 향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민주당 홍익표 정책위수석부의장은 최근 원내대책회의에서 “국정원은 대통령 지침을 받고 따르는 핵심기관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 전 원장 간 어떤 밀약과 지시, 방침이 있었는지 이 전 대통령은 이것을 알았는지, 어떤 짓을 했는지 검찰이 조사해야 한다. 원 전 원장 차원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편, 원 전 원장은 7월 24일 법정 최후진술에서 “국정원 간부들과 나라를 걱정하며 나눈 이야기를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는 일부의 시각은 너무 안타깝다. 심리전단 직원들의 일도 북한의 대남 선동에 대한 방어로 생각했지 그것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행위였다면 바로 중단시켰을 것이다. (나는) 국정원장직에서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 보통 사람의 일상을 보내려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선거나 정치에 개입하겠는가”라고 하소연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