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젊은 시절 보았던 미녀배우도 저렇게 늙을 수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김지미, 최은희, 엄앵란, 정윤희, 원미경등 미녀스타들은 시간의 바다위에 떠서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로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얼마 후 영화가 아닌 영화배우 허진씨의 실제의 삶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됐다. 영화에서 본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것 같이 그녀는 오랜 시간 혼자 처참한 환경속에 있었다. 그녀의 고백은 이랬다.
“배우를 할 때 입었던 의상들을 하나하나 팔아서 먹을 걸 샀어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와 백원짜리 동전 두 개로 일주일을 살아야 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차라리 굶어죽으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었어요.”
스타로 잘 나가던 그녀는 영화계에서 퇴출을 당했다고 했다. 그 이유가 특이했다. 인기 높던 시절 교만하고 건방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영화 촬영장에서 밥을 먹는데 다른 배우의 밥에는 계란부침이 있는데 나한테는 없는 거예요. 사람을 차별하나 하고 기분이 나쁘더라구요. 그래서 뒤도 보지 않고 촬영을 펑크내고 가버렸죠. 그때 감독이 유명한 신상옥씨였는데 제가 그런 건방진 행동을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출연섭외가 점점 줄어들다가 아주 끊어져 버렸죠. 건방지고 교만하다고 소문이 난 겁니다. 아예 일거리가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일이 들어와야 밥을 먹고 사는데 바닥까지 간 거죠. 도대체 그 계란부침이 뭐라고 내가 그랬는지 몰라요. 지금 같으면 나도 하나 달라고 하면 될 텐데 그때는 그랬어요.”
세상에 얼굴이 알려진 스타는 막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오랫동안 공백기가 있었고 그녀는 팬들로부터 점차 잊혀 진 것 같았다.
“단칸방에서 생활비도 없이 살 때 한번은 아는 사람 결혼식에 갔었어요. 그때 선배배우가 맛있는 것 사먹으라면서 몰래 이십 만원을 주더라구요. 저한테는 정말 큰돈이었어요.”
그녀는 겸손해 졌다. 단역이 들어왔다. 다시 일을 하게 됐을 때의 심정을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역이든 일 자체가 감사였죠. 촬영장에 가 보면 전에 제가 건방지고 못되게 행동했던 것 때문에 아직도 미워하는 눈으로 저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절대명제 앞에서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문제더라구요. 유명세도 좋고 인기도 중요하지만 밥 앞에서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배우라는 직업이 성경 속에 나오는 하루 종일 일을 시켜줄 사람을 기다리는 품꾼 같구나 하고 깨달았다. 수백명 수천명의 연기자들이 배역이 들어오길 목말라하면서 기다리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품꾼같은 직업은 배우만이 아니다.
변호사인 나도 품꾼이었다. 몇 달이 흐르고 일 년이 가도 사건을 맡기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일자리라는 게 무엇일까. 처음에는 돈을 벌어야 하는 ‘돈 터’로 생각했다. 일은 대충하고 돈만 많이 벌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끓었다. 세상은 현명했다.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의 샘물은 끊기기 마련이었다.
일터를 내가 살아가는 ‘삶터’로 바꾸어 생각했다. 일은 나의 삶의 일부였다. 변호사라는 배역을 맡으면 그 사건이 나의 삶속에 들어와 일부가 되었다. 겸손과 낮아짐이 있어야 세상은 나를 받아들였다. 이제 인생의 황혼이다. 노을 진 인생의 저녁에 나를 돌이켜 보면 나의 일터는 수행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갑질을 하는 교만한 의뢰인도 많았다. 더러 행패도 당하고 모함을 받기도 했다. 그런 고난들은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수행의 기회였다. 모두 다 감사로 받아들인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