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출범 초기부터 송현광장 전제로 논의 정황…불교계 등 거센 반발, 서울시·재단 “결정된 것 없다”
#송현광장, 이승만 사저와 18분 거리
현재 재단에는 박지만 EG 대표이사, 노재헌 재단법인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등 전직 대통령 아들들과 4·19 혁명에 참여했던 이영일 전 의원,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 등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영훈 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있다. 이 전 교수는 학예연구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는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등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왔다. 이 밖에 이인호 전 KBS 이사장, 김길자 전 경인여대 총장, 김명섭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이 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관련기사 [단독] ‘위안부 발언 물의’ 이영훈, 이승만재단 추진위원 합류).
재단 출범 당시인 2023년 7월경 기념관이 들어설 장소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인근(서울 중구), 이승만연구원(서울 종로구), 낙산근린공원(서울 종로구),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기금관리위원회 위원)의 사유지 4000평(서울 강동구) 등이 거론됐다. 이때 송현광장(종로구 송현동 48-9 일대)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 2023년 11월 9일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송현광장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이날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청에서 재단 위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는 손병두 이승만기념관부지선정위원장을 비롯해 이인호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이영일 대한민국역사와미래 고문, 한용외 인클로버재단 이사장, 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장,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복거일 소설가,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등 9명이 참석했다.
오 시장은 위원들에게 ‘송현공원 내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검토’라는 제목의 PPT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는 기념관 건물 배치도, 면적, 소요경비, 3~5층 규모의 주차장 신설 계획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오 시장은 지난 2월 23일 서울시의회 임시회 최재란 시의원(더불어민주당·비례) 질문에 “건립 장소로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데가 송현광장”이라고 답했다. 이어 오 시장은 “지난번에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서울시를 방문해 논의할 때 시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전제로 송현동도 검토하겠다고 결론이 났다”고 설명했다.
다만 서울시는 지난 3월 14일 “기념관의 송현동 부지 입지에 대해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는 이날 배포한 설명자료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은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에서 추진하는 사업으로 이 사업의 규모·장소·시기·조성 절차 등은 기념재단과 정부의 방침이 우선돼야 하는 것”이라며 “금년도에 기념재단 측에서 기념관 입지 등과 관련해 우리 시에 공식 제안하거나 협의한 바는 없다”고 했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재단은 출범 초기부터 송현광장을 후보지로 낙점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복수의 재단 관계자 등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송현광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관련이 깊다. 이곳은 이 전 대통령 사저인 이화장에서 차로 18분 거리다. 광장이 있는 송현동은 이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미국 외교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그 다음 실리적인 이유가 고려됐다고 한다. 송현광장은 넓이 3만 6903.3㎡로 서울광장(1만 3207㎡)보다 약 3배 더 크다. 기념관을 큰 규모로 지을 수 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관광지다. 인근에 광화문과 경복궁이 있다.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 공연장도 이 일대에 밀집해 있다. 광장 안에는 이건희 기증관이 2028년까지 들어설 예정이다. 기증관에는 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소장품이 전시된다. 이러한 관광명소와 연계하면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후보지들은 처음부터 제외됐던 것으로 보인다. 신영균 명예회장 사유지는 위치가 서울 남동쪽 외곽이다. 접근성이 좋지 않다. 그린벨트 규제도 걸려 있다. 이승만 연구원은 기념관이 들어서기에는 부지가 비좁다. 낙산근린공원은 산에 있어 접근성이 낮아 부적합하다는 지적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4월 30일 오후 서울 배재학당에서 열린 재단 내부 회의에서는 송현광장을 부지로 하는 것을 전제로 기념관 건설 관련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회의에서는 기념관의 공원 내 위치, 규모 등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와 재단이 송현광장을 부지로 하는 것을 전제로 협의 중이라는 재단 관계자의 전언도 나왔다. 이 관계자는 일요신문에 “기념관 건립 이야기가 나온 다음 (송현광장 부지를 사용하겠다는) 재단의 의견이 전달됐고, 서울시에서도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여서 협의가 시작된 것으로 안다”며 “(송현광장으로 하기로) 재단 쪽에서는 의견을 모았고, 서울시도 상당 부분 그것을 받아들여서 (양측이) 부지 문제를 의논하는 중”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제5차 도시·건축공동위를 개최(4월 30일)하고 ‘북촌 지구단위계획 결정(변경)(안)’을 수정 가결했다고 5월 1일 밝혔다. 변경안에는 송현공원 일대를 문화공원, 주차장, 문화시설 등으로 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설 동쪽 부지는 문화시설로 지정됐고, 서쪽 부지는 문화공원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문화공원으로 지정된 서쪽 부지는 이승만기념관 설립이 논의됐던 지역이다.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는 “문화공원에 설치할 수 있는 공원시설은 문화자원의 보호·관람·이용·안내를 위한 시설로서 조경시설·휴양시설(경로당 및 노인복지관은 제외한다)·운동시설·교양시설·편익시설 및 동물놀이터(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특별자치도·시 또는 군의 조례로 설치를 허용하는 경우에 한정한다)로 할 것”이라고 규정돼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기념관은 교양시설 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승만기념관이 법적으로 원천 차단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도서관 등 교양시설 용도로 사용하면 법적 문제가 없어진다.
재단의 다른 관계자는 “송현광장을 가장 좋은 입지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고 있어서 (재단 측에서도) 그쪽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러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그렇다고 (송현광장으로) 확정되거나 관련된 절차들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각계각층의 거센 반대 넘어설까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송현광장이 유력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회 각계각층에서 거센 반발이 나왔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은 오 시장이 재단에 보여준 설명자료(PPT) 제출을 요구했다. 이들은 서울시에서 만든 자료인 만큼 시의회에도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서울시가 송현동을 먼저 제안한 사실이 없다”며 시의회 제출 의무가 있는 내부 문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최재란 시의원은 일요신문에 “(이승만 재단에서) 만들어 온 자료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 자료는 서울시에서 만들었다”며 “지난해부터 요구했는데, 아직도 (제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불교계도 반발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 옆 송현광장에 이승만기념관이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송현광장에서 조계사는 차로 2분 거리다. 불교계는 이 전 대통령이 집권 당시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고 보고 있다. 조계종 평화위원회는 2월 28일 성명서를 내고 “시민과의 약속을 깨고 이곳에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오세훈 시장의 이번 발언은 상식적으로 시민과 불교계를 우습게 여기는 몰상식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3·15 의거 기념일인 3월 15일 사월혁명회 등 15개 단체는 송현광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민적 합의도 생략하고 마치 송현광장이 자신의 사유물인 양 기념관 부지로 내놓겠다는 발상을 당장 거둬들여야 한다”며 “기념관 건립에 대한 일체의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4·19 혁명 기념일인 4월 19일에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16개 독립운동·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과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김영배, 오기형 의원, 곽상언 당선자 등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 국민은 제22대 총선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실정과 역사 퇴행을 준엄하게 심판했다. 이제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이승만기념관은 물론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그 어떤 우상화와 미화 작업에서도 당장 손을 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송현광장은? 역사·문화 요충지…'이건희 기증관' 짓는다
송현광장이 있는 송현동은 조선시대 왕족과 명문 세도가들이 살았다. 송현광장 일대엔 구한말 친일파 윤덕영과 윤택영 형제가 집을 짓고 살았고, 일제강점기 땐 조선식산은행 사택이 들어섰다. 사택은 해방 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됐다. 부지는 미국 정부 소유가 됐다. 미국 정부는 1949년부터 1990년까지 이 지역을 소유했다. 숙소는 1990년 용산 미 8군 기지로 이전됐다. 부지 소유권은 한국 국방부로 넘어갔다.
1997년 다시 땅 주인이 바뀌었다. 삼성가가 땅을 인수했다. 삼성가는 이 지역에 대형 미술관을 포함한 문화단지를 구상했다. 그러나 같은 해 터진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계획은 무산됐다. 2008년 한진그룹이 부지를 인수했다. 한진그룹은 이 지역에 7성급 호텔 건립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 지원도 받았다. 그러나 ‘땅콩 회항 갑질 사건’이 터지면서 여론이 악화됐고, 호텔은 건설되지 못했다.
2010년에는 조선 말기의 집터와 우물 등의 유적이 발굴됐다. 이 유적 발굴은 한국 근대 도시 고고학계의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조선 말기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은 근현대사를 담은 주요 역사·문화관광지로 떠올랐다. 또한 이 송현광장이 있는 지역은 동서로는 서촌·경복궁·창덕궁을 잇고 남북으로는 북촌·인사동을 잇는 가운데 축에 위치해 있다. 역사·문화관광의 요충지인 셈이다.
서울시는 2021년 이 일대를 공원화하겠다는 목적으로 한진그룹과 부지 교환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에는 서울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한진그룹 등이 참여했다. LH가 송현동 부지를 사들인 다음 서울시가 소유한 가락동의 구 성동구치소 부지와 교환했다.
같은 해 4월 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유족이 약 2만 3000점의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7월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소장품이 전시될 기증관 부지로 송현동을 낙점했다. 문체부는 서울시 송현광장 동쪽 9797㎡를 서울시와 협의해 국유지와 교환했다. 기증관은 2028년 완공될 예정이다.
이후 서울시는 2022년 10월 7일 송현녹지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개방했다. 지하 2층 규모의 대형 지하주차장 건설 계획도 발표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외에 다른 건물은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건희 기증관과 지하주차장이 착공되는 2025년 하반기에는 광장 전체가 폐쇄된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