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발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교체설 막전막후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앞서 친박 금융인으로 분류된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8월 17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금융권 안팎에선 정 이사장의 사의 표명을 계기로 박근혜 정부 당시 임명된 금융기관 수장들이 줄사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정권 교체로) 부담을 느낀 정 이사장 스스로 사임을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금융권의 이목은 또 한 명의 친박 금융인으로 분류되는 이동걸 회장에게 쏠렸다. 금융 자산만 230조 원에 달하는 산은은 정부 정책 자금을 집행하는 국책은행으로서 국내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역대 정부마다 권력 실세와 가까운 인사가 산은 수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와 국정 철학이 다른 사람이 ‘곳간’을 지키고 있으면 원활한 정책 집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자신을 둘러싼 사퇴 압박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지난 5월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줄곧 사임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법률로 보장된 임기가 2019년까지인 상황에서 잔여 임기를 채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 청와대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달리 “인위적인 인사 물갈이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대구 태생인 이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이사장을 지낸 영남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경제금융학부 석좌교수를 역임한 정통 TK(대구·경북) 금융인이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금융인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 후 산은 회장에 대한 교체설이 끊임없이 불거진 배경에는 ‘TK 배제’라는 정부 인사 코드가 반영된 영향이 적지 않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적폐 청산을 국정 목표로 삼은 현 정부에서 이 회장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말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청와대는 표면적으로 산은 인사 문제에 대한 개입을 자제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산은 회장에 대한 인사 제청권을 가진 금융위원회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 7월 내정된 최종구 위원장에게 ‘칼자루’를 내어줬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다른 해석이 나온다. 친문 핵심그룹과 특별한 유대가 없던 최 위원장에게 청와대가 갑자기 전권을 내어줄 리 없다는 것이다. 실제 청와대는 문재인 캠프 출신이자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불리는 이동걸 동국대 교수를 신임 산은 회장에 내정했는데 이 교수에 대한 인사 검증은 최 위원장 임명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앞의 은행 관계자는 “이 교수에 대한 금융권 내부 평판은 엇갈리는 편”이라며 “참여정부 시절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외부 영입됐는데 공직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8월 28일 열린 이사회에 불참했지만 식후 비공개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자신을 둘러싼 ‘교체설’을 일단락짓기 위해서라도 최 위원장과 만남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인 29일 아침에는 “신임 산은 회장으로 이동걸 교수가 내정됐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현 회장이 사의 표명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임 회장의 내정 사실이 확정 공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앞의 여권 관계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첫째는 여론을 살피기 위함이고, 둘째는 이 회장에 대한 압박의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에 대한 압박은 앞서도 있었다. 지난 5~6월 감사원은 산업은행을 겨냥해 동양물산기업 특혜 의혹에 대한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산업은행이 자회사인 국제종합기계를 처분하면서 동양물산기업에 특혜 대출을 주고, 저가 매각했다는 의혹이 핵심인데 최근 감사원은 특혜 제공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검찰 수사 중인 KAI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지만 이 회장 전임 시절부터 벌어진 일이라 직접적인 문책이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더구나 산은은 이 회장이 취임한 2016년 경영평가에서 2015년보다 한 단계 높은 B등급을 받았다. 부실 지원 논란이 일었던 대우조선해양은 흑자 전환했다. 경영면에서 ‘치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없는 셈이다. 금호타이어 매각 협상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끌려 다닌 면이 있지만 이 회장을 대신해 신임 회장이 온다면 매각 최종 결정은 또 다시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이 회장의 자진 사퇴를 이끌어내야 하는 최 위원장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산업은행 본점.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산은에 따르면 이 회장은 8월 30일 현재 정상 출근하고 있으며, 사의 표명에 대해선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일각에선 이 회장이 거취 정리를 위해 해외 출장을 취소하는 등 외부 일정을 축소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취소된 일정이 없으며, 회장 인사와 관련한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청와대는 오는 9월 내로 신임 회장을 임명한다는 계획을 잡고 있지만 이 회장이 버틴다면 그 시기는 늦어질 수 있다. 산은 노조가 이동걸 교수 임명에 대해 ‘낙하산 인사’라며 반발하고 있는 것도 변수다.
이 회장 거취의 또 다른 변수는 대우건설 관련 각종 의혹과 국회 국정감사가 꼽힌다. 이미 박근혜 정부 당시 임명된 박창민 전 대우건설 사장은 자진 사임했고, 교체 대상으로 거론되는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은 국회 국정감사 준비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 원장마저 사의를 표명하면 이 회장이 받는 압박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금융권 관계자는 “아마 이 회장은 자신이 ‘찍어내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산은 문제 해결 여하에 따라 최 위원장의 입지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