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아파트, 광주대단지사건 당시 정권에 쓴소리 하다 추방된 김중업...삼일빌딩, 세실극장 등 서울 곳곳에 유작들
[일요신문] 청계천 걷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이곳을 걷고 있노라면,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마천루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 하나하나가 서울의 개발사를 빼곡하게 담아내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최준필 기자 =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85 삼일빌딩 전경. 17.08.30.
김중업 선생의 대표작인 삼일빌딩은 서울미래유산입니다. 지상31층(지하2층)의 이 오피스 빌딩은 당시 김중업 선생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마천루 원형 모델을 국내 최초로 도입해 설계한 작품입니다.
특히 미국의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대표작 ‘시그램빌딩’을 참조해 한국의 형편에 맞게 재창조한 경우입니다.
진정한 미(美)의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다고 하죠. 김중업 선생의 삼일빌딩은 지금 당장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 우리 건축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 건물로 여겨집니다.
그 근처 덕수궁 옆 성공회회관(1976作) 역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김중업 선생의 작품입니다. 이 건물에 들어선 세실극장은 우리 연극사에 있어서 빼놓지 못할 장소입니다. 320석 규모의 객석을 갖춘 극장은 부채꼴의 공간 구성 속에서 관객의 시야를 완벽하게 확보한 구조입니다.
미를 추구하면서도 실용성을 놓치지 않았던 김중업 선생의 지향점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죠.
건물의 외형 느낌은 딱 ‘부조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 적인 건물 구조임에도 주변의 건물들과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 건물에 들어선 한식당 ‘달개비’는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등 주요 정치인들이 회담 장소로 자주 애용하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죠.
최준필 기자 = 30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3-7 세실극장 전경. 17.08.30
이러한 문화유산을 남긴 김중업 선생은 건축사에 있어서의 업적 이외에도 꼭 되새겨봐야 할 인물입니다. 그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지난 박근혜 정권의 많은 실책과 헛발질 중 가장 반민주적인 행태로 꼽히는 것은 바로 ‘문화․예술인’에 대한 블랙리스트 사태였죠.
김중업 선생의 생전 모습. 출처=김중업 박물관
그것도 현재 ‘블랙리스트’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항해서 말이죠.
알려졌다시피 김중업 선생은 당대 천재 건축가였던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사사받은 세계적인 거장이었습니다. 1952년 르 코르뷔지에를 무작정 찾아간 김중업 선생은 2개월에 걸친 테스트 끝에 그의 제자로 받아들여졌고, 훗날 르 코르뷔지에는 김중업 선생을 포함해 오직 다섯 명만을 ‘수제자’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사족으로 말하자면 르 코르뷔지에는 당시 한국이란 나라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그저 낮선 곳에서 무작정 찾아온 용감무쌍 동양인 청년의 ‘열정’만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
제자를 곁에 두고 싶었던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중업 선생은 1956년 2월 불모지였던 조국으로 귀국합니다. 귀국 후 그는 건축사무소를 열었고, 조형․예술계통의 명문인 홍익대에서 후진양성에 힘씁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김중업 선생은 국내에 복귀하자마자 정부와 기업 등의 건축 의뢰가 쏟아졌고, 불모지였던 한국에 자신만의 작품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사실 그는 그렇게 건축가로서의 품의와 경제적 여유로움을 유지하고 살 수 있었죠.
하지만...그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아니...그저 건축가로서 해야 할 말을 할 뿐이었죠. 문제는 당시 시대가 ‘할 말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는 것.
김중업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불도저식 도시개발과 졸속개발의 면면에 대해 비판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개발로 인해 내쫓기던 민중을 중심에 뒀고, 그들의 어두운 면면을 지나치지 않았죠.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1970년 4월 완공 4개월 만에 붕괴된 ‘와우 아파트 사건’입니다. 와우 아파트는 한 마디로 총체적 부실이자 예고된 사고였습니다. 당시 정권의 충복이었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단시간에 말도 안 되는 저비용으로 아파트 시공을 명령했습니다. 그것도 청와대에서 잘 보이도록 기반이 약한 산 중턱에 건설을 명했죠.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현장. 출처=서울시
시공사는 결국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무면허 건설업자를 고용했고, 그나마 약한 지반에 철근까지 덜 넣는 날림 공사를 꾀했습니다. 결국 아파트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완공 4개월 만에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채 무너지고 말았죠.
이에 김중업 선생은 마이크를 잡습니다. 어느 건축가도 이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한 가운데 그는 라디오 방송국이었던 <동아방송>에 직접 출현했습니다. 그 자리서 김중업 선생은 말 그대로 김현옥 서울시장을 향해 요목조목 따져가며 비판에 비판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도시개발의 총책은 정부였기 때문에 김중업 선생의 비판은 사실상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겨눈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김중업 선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울의 도시빈민들의 삶에도 주목했습니다. 1971년 8월에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도시 빈민 탄압 사례이자 빈민 투쟁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광주대단지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서울 내 판자촌 빈민들을 서울 외곽이었던 경기도 광주에 대거 이동 시킨 지역을 의미합니다. 정부는 애초 판자촌 빈민 10만 명에게 싼 값으로 외곽지역 땅을 매매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한다는 것이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빈민들이 광주단지에 들어섰을 때 그곳은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는 천막 단지에 불과했습니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도 하루에 여섯 대에 불과했죠. 말 그대로 허허벌판에 빈민들을 밀어 넣은 것이었죠. 결국 이에 폭발한 빈민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나서야 진압되기에 이릅니다.
김중업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막무가내 식 빈민이주 사업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그는 이 사건 직후 <동아일보>에 직접 기고문을 통해 이주 사업을 주도했던 서울시와 정권을 향해 가감 없는 비판을 가합니다.
서슬파란 정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광주대단지사건 당시 모습. 사진=서울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중업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정부는 김 선생을 프랑스로 강제 추방했고, 표적성 세무조사로 거액의 세금을 추징했습니다. 결국 그는 수주 설계비는커녕 자택과 부동산 모두를 잃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발생 후 약 45년 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발생하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축가였다는 점입니다. 프랑스는 그런 김 선생을 품어주었고, 그는 훗날 미국 하버드대학 등 명문학교 초청을 받아 교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김중업 선생은 1979년 10월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다시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그토록 미웠던 조국이었지만, 그는 다시 묵묵히 한국으로 돌아와 1988년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업을 다합니다.
앞서 살펴본 서울미래유산들 외에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는 김중업 선생의 유작들이 숨 쉬고 있습니다.
김중업 선생은 지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고단했지만 말입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