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140고지 전적지, 1.21사태 소나무 등 ‘서울미래유산’, 엉망진창으로 방치된 까닭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북한을 ‘대화의 협력의 동반자’이자 ‘대남적화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자유민주체제의 전복을 획책하는 반국가 단체’로 규정해왔습니다. 현 시점에서, 북한은 잦은 도발로 한반도를 긴장케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도발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옛날 그 시절,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대남도발을 이어왔습니다. 간첩을 태운 잠수함을 동해로 보내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특수부대를 이끌고 내려온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군은 사력을 다해 북한군과 공작원들을 격퇴해왔습니다. 북한이 도발을 일으켜도 국민들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서울미래유산은 북한을 제압한 한국군의 ‘영광의 상처’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북악산엔 북한군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한 1․21사태를 기억하고 있는 소나무가 있습니다. 청와대 주변 에 솟아있는 연막탄 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6․25 당시 한․미 연합 해병대가 북한군과 혈전을 벌이고 점령한 연희104고지도 서울미래유산입니다.
<일요신문i>는 1․21사태 소나무, 연막탄지주, 연희104고지 전적지를 차례로 둘러봤습니다. 우리 군의 투철한 애국심과 영광을 느낄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백 투 더 서울’ 취재에서는 ‘명’을 느낄 수 있었지만 동시에 ‘암’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관리 부실로 방치된 미래유산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연희104고지 전적비 입구 사진. 박정훈 기자
9월 5일 기자는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습니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수복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곳입니다. 개전 초기 국군과 연합군은 낙동간 전선까지 밀려 내려갔지만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장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눈앞에 뒀습니다. 각종무기로 무장한 공산군은 연희 104고지에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해병 제1,2대대는 3일간 (1950.9.21~9.23) 공산군과의 악전고투 끝에 연희 104고지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사살된 공산군 숫자는 무려 1705명, 아군의 희생은 178명에 불과했습니다. 한국군의 104고지 점령으로 공산군의 서부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서울 수복 작전의 9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연희 104고지 전적비 전경. 박정훈 기자
우뚝 솟은 전적 기념비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1958년 9월 28일 해병대 사령부는 연희 104고지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1.5m 높이의 기념비를 설치했습니다. 약 25년 뒤인 1982년 9월 28일, 해병대사령부는 7.8m 높이의 전적기념비를 새롭게 다시 세웠습니다.
전적기념비 하단에는 “104고지 일대를 요새화해 난공불락을 호언하며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확보 중에 있었으나,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해병대는 공격을 계속, 해병 제1대대가 104고지를 조기에 탈취해 역사적인 수도 탈환 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서 해병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사한 장병들을 위한 진혼시와 참전지휘관 명단이 기념비 하단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특히 진혼시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여”로 시작해 “젊은 해병 혼이여 한 많은 역사의 사연을 잊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평안히 쉬옵소서(수도 서울탈환전투에서 산화한 해병의 영전에)”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해병대가 연희104고지 탈환에 실패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전적비를 둘러보면서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잡초 사진.
전적기념비로 향하는 입구 사진입니다. 잡초가 보이시나요?
서울미래유산 동판과 잡초
‘서울미래유산’ 동판은 전적기념비 하단에 있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판 옆에도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동판 상단은 어떨까요?
누군가 해병대의 전적을 기리기 위한 유적지에서 생일 파티를 벌인 것입니다. ‘happy birthday to you’라고 적힌 종이를 태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전적기념비의 바닥의 소재는 목재입니다. 하마터면 전적기념비터 전체가 불에 탈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습니다. CCTV도 없어 방화범을 잡을 길도 없습니다.
전적기념비 뒤편에도 잡초가 많았습니다.
전적기념비 뒤편 사진
곳곳에 널려 있는 쓰레기는 해병대의 정신을 무색케 만들었습니다. 먹다버린 음료수병과 나뒹굴고 있는 페트병이 보이시나요? 씁쓸한 장면입니다.
널려 있는 음료수병이 양동이에 담겨 있고(상단) 페트병이 나뒹굴고 있다.
아래는 연희104고지 전적지의 과거 사진입니다. 연희 104고지는 불과 몇 년 전까지 깨끗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온갖 잡초와 쓰레기가 널려 있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전적기념비터 과거 사진. 서울미래유산 공식 홈페이지 캡처
9월 7일 기자는 1.21사태 소나무가 있는 북악산 등산로를 찾았습니다. ‘1.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입니다.
북악산 한양도성길 등산로 입구. 박정훈 기자
1968년 1월 13일 북한 조선인민군 김정태 정찰국장은 124부대의 공작원들에게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내렸습니다.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1월 17일 자정께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대한민국 수도권에 침입했습니다.
이들은 순식간에 청와대 코앞인 청운동의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지휘하는 경찰 병력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진 뒤 북악산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북악산 정상 부근에는 124부대 공작원과 우리 군이 벌인 교전의 흔적이 소나무에 남아있습니다. 1․21사태 소나무는 15개의 총탄자국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소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숙정문~말바위안내소~와룡공원~혜화문(4.7㎞/2시간)으로 이어지는 북악산(342m) 등산로를 올라가야 합니다.
밀바위안내소 전경(좌)과 방문신청서
1․21사태 소나무는 창의문과 숙정문 사이에 있습니다. 북악산은 군사구역입니다. 등산로 오르기 위해 신분증이 필요합니다. 기자 역시 말바위안내소에서 신분증를 내고 방문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한양도성길을 따라 늘어선 철조망. 박정훈 기자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등산로를 오르면서 곳곳에 철조망이 보였습니다. 약 100m 간격으로 초소가 있었고 초소 밖에서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들이 많았습니다.
1.21사태 나무. 박정훈 기자
정상 인근의 백악마루에 올라선 순간, 1.21사태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붉은 색깔을 띤 탄흔들이 보이시나요?
1968년 1월 21일 그 때 그 시절, 북악산으로 침투한 공작원 31명 중 29명은 교전 중에 사살됐습니다. 1명(박재경 조선 인민군 대장)은 북한으로 도주했고 1명(김신조)은 투항했습니다.
1.21나무와 등산객. 박정훈 기자
김신조는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내레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국민들은 경악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21 사태 이후 대한민국 향토 예비군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을 공격하기 위한 특수부대인 684 부대도 비밀리에 조직했습니다.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 된 부대입니다.
1.21사태 나무 주변에 울타리가 없다. 박정훈 기자
이곳에서도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북악산 등산로 표지판에선 1․21사태 소나무에 대한 안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소나무 주변에 울타리가 없어 관광객들의 손길에 탄흔 자국이 훼손될 우려도 있었습니다. ‘서울시 미래유산’ 동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을 내려온 기자는 연막탄 지주를 찾아 나섰습니다. 연막탄 지주는 1.21 사태가 일어난 뒤 박 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시설물입니다. 10~15m 높이의 연막탄 지주는 주간에는 연막탄을, 야간에는 조명탄 발사대로 사용하기 위해 청와대 인근 삼청동과 청운동 곳곳에 56개가 설치됐습니다.
연막탄 지주.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아 종로구청은 2013년부터 시설물의 철거를 진행했습니다.
효자로13길58(좌) 자하문로24길43에 있는 연막탄 지주. 박정훈 기자
지금은 12개의 연막탄 지주만 남아있습니다. 기자는 자하문로24길43과 효자로13길58에 있는 연막탄 지주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연막탄 지주 주변엔 서울미래유산 동판과 작은 표지판조차 없었습니다. 냉전시대 당시 극한으로 치달았던 남북대결을 상징하는 유산이 흉물스러운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셈입니다.
북한의 제6차 핵실험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최고 수준의 응징을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여야 의원들은 일제히 북한의 도발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국군의 고귀한 희생이 담긴 유산들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영광의 유산’들을 소중하게 지키기 위한 작업이 시급해 보입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