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빵걸’ 그땐 대륙을 사르르
▲ 50년대 대표적 핀업걸 베티 페이지 | ||
지난 1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상큼발랄한 미소와 육감적인 몸매로 한때 최고의 핀업걸로 군림했던 베티 페이지(85)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50년대의 대표적 핀업모델로 <플레이보이>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지의 모델로 등장했으며, 본디지영화(Bondage film: 채찍질을 하거나 밧줄로 여성을 묶는 다소 가학적인 내용의 성인영상물) 배우로 활약하면서 ‘밤의 그레타 가르보’로 불렸다.
동시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그레타 가르보와 페이지는 모두 비슷한 때에 배우지망생으로 출발해서 결국 남성들의 우상으로 칭송받는 모델 겸 배우로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가르보가 할리우드의 영화사 MGM을 대표하는 세계인의 연인이었다면 페이지는 맨해튼의 ‘무비스타 뉴스’라는 핀업 사진과 본디지 영화 전문 제작소의 간판스타로 수많은 남성팬에게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발췌된 그녀의 전기 <진짜 베티 페이지: 핀업여왕에 관한 진실>에 따르면 배우지망생으로 출발한 페이지가 유명 핀업걸이 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고향 내슈빌의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우수한 성적에 고등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페이지는 잠시 교사와 비서로 일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곧 영화배우의 꿈을 위해 할리우드로 떠났다. 당시 그녀는 이미 이웃학교 축구선수였던 빌 닐과 결혼한 상태였다.
1945년 20세기 폭스사의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셨고, 그후 거듭된 오디션에서도 계속 떨어지고 남편과도 이혼을 하자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향했다. 그러나 뉴욕 역시 그녀에게는 기회의 땅이 아닌 듯했다.
▲ 핀업걸 출신인 세계적 스타 마릴린 먼로. | ||
그러나 30대 중반을 맞은 베티는 갑자기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수녀가 됐다, 자살했다, 출산했다는 등 소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뿐 그녀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훗날 그녀에 관해 쓰인 두 편의 전기에 따르면 페이지는 은퇴 후 종교에 귀의해 빌 그레이엄 목사가 이끄는 선교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정신질환으로 재활시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이 그녀는 첫 남편 빌과의 재결합을 비롯해 세 차례 결혼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페이지가 핀업걸로 활동한 시기는 단 7년이었다. 그러나 카메라와 대중의 시선 앞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사진과 영상 속의 그녀는 여전히 많은 남성들에게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죽기 전 기자를 만난 페이지는 사진촬영을 극구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성기의 젊은 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페이지가 전성기를 보낸 1950년대는 ‘핀업걸’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며 피폐한 전장의 청년들에게 위로가 된 작은 사진 속의 핀업걸들은 1910년부터 1960년대까지 남성들의 로망으로 자리했다. 핀업걸들 중 마릴린 먼로, 리타 헤이워즈, 브리짓 바르도, 잉그리드 버그만 등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이자 섹스심벌로 등극하기도 했다.
핀업모델이 등장한 것은 1890년대부터였지만 ‘핀업(Pin-up)’이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941년이었다. ‘벽에 고정한다’는 뜻의 영어 표현에서 나온 ‘핀업걸’은 잡지나 포스터, 엽서, 달력 등 대량생산된 인쇄매체에 주로 비키니나 란제리 차림의 모습으로 등장한 여성모델을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핀업’ 하면 달력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어딜 가나 하나씩 벽에 걸어두던 것이 바로 달력이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핀업’에 대한 인식이나 의미는 많이 변화했다. 여성의 상품화라는 비난 속에도 이제 대스타를 비롯한 많은 배우들과 가수, 모델들은 남성의 눈이 아닌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부각하거나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현대판 핀업걸로 나서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최근 다양해진 여성의 이미지와 사진작업의 한 장르로서 ‘핀업’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핀업’은 복고적이고 여성적인 스타일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의상을 포함한 패션계 전반에서 화려하고 귀여우면서도 여성의 몸의 굴곡을 살리는 스타일을 ‘핀업스타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7월 ‘유고걸’로 컴백한 가수 이효리가 ‘핀업스타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예준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