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폐업’ 속 검경 국내 정보 수집 경쟁 예고
대검찰청은 이미 팀장격인 5급(사무관) 인선을 끝냈고, 현장에서 뛸 6·7급 수사관(IO)을 선발하는 단계다. 현재 검찰이 추진하는 IO 규모는 14명 정도. 문무일 총장 취임 직후 범정 기능이 잠정 폐지될 당시 30~40여 명 정도의 IO를 운영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채용도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당초 11월 중 7명을 뽑을 예정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채용이 늦어지고 있다. 대검은 늦어도 12월 중 7명 정도를 뽑고, 내년 초 수사관 인사 때 7명 정도를 충원해 14명 안팎으로 범정을 운영할 방침이다. 다만 대검찰청과 함께 문을 닫았던 일선 지검의 범정 라인은 당장은 부활시키지 않고, 서울중앙지검만 다시 범죄 첩보 수집 기능을 만들 계획이다. 서울중앙지검 외에 지방 소재 지검 중 가장 규모가 큰 부산지검 역시 아직 범정 기능을 만들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정’은 사실 검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조직이다. 범정 없는 검찰은 특수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수수사를 할 수 없는 검찰은 ‘칼’이 없는 장수나 마찬가지다. 범죄 관련 첩보를 토대로, 은행 계좌·유무선 전화 기록 추적 등 핵심 관계자들을 은밀하게 내사해 ‘누가 어떤 목적의 뇌물을,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전달했는지’와 같은 기본 구조를 짜맞춘 뒤 공개수사(압수수색)에 착수하는 게 특수수사의 기본 흐름이다.
특수수사 경험이 많은 한 부장검사는 “범정에서 넘겨주는 정보가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구린 게’ 많은 사람들이 범정에서 이름이 거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수사하다보면 오히려 범정에서 알려주지 않은 더 많은 범죄 혐의들이 나오기도 한다. 범정은 특수수사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문무일 검찰총장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적폐로 지목된 검찰은, 스스로 살기 위해 검찰 내부의 적폐 조직으로 범정을 지목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7월 말, 취임하자마자 대검찰청 범정기획관실을 비롯, 각 지검의 범정 기능 폐쇄를 결정했다. 문을 닫는 과정도 이례적이었다. 압수수색하듯 전격적으로 진행됐다. 문무일 총장 결정 직후, 사무실에 들이닥친 검사들과 수사관들은 근무 중인 검사와 수사관들에게 “컴퓨터와 각종 문서에서 모두 손을 떼고 나가라”고 통보했고, 검사와 수사관들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기존 범정기획관실의 구조와 역할을 짚어봐야 알 수 있다. 기존 대검찰청 범정기획관실은 차장검사 급 범정기획관 지휘 하에 부장검사 급 1·2담당관 체제로 운영됐다. 1담당관은 부정부패·경제 사범·언론·정보통신을 포함한 각종 범죄 정보를, 2담당관은 공안·선거·노동·대공·사회단체 및 종교 등 사회 전반의 동향 정보를 수집했다. 보통 ‘1’이라는 숫자가 더 중요 보직인 경우가 많지만, 다루는 정보는 2담당관 산하에 더 예민한 내용들이 많았다. ‘동향’이라는 ‘애매한 정보’까지 모으는 게 2담당관이었기 때문이다.
총장들 역시 범정 라인을 단순 범죄 정보 수집 기능만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이를 취합해 보고하는 범정기획관은 총장에게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임명됐다. 예민한 정보들은 총장에게 단독으로 보고했는데, 범정기획관은 그 자리에서 세평을 중심으로 어떻게 총장이 대응해야 하는지 조언하곤 했다.
특히나 국회반발이 예상되는 사건 등을 앞두고는, IO들이 가지고 오는 국회 분위기와 특정 국회의원의 예상 반응과 같은 정보에 더 많은 가치가 부여됐다. 검사장 등 위로 올라갈수록 정치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게 검사의 숙명인 구조도 한몫했다. 여당이나 야당이 반발할 수 있는 정치인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수집된 정보 중에는 과장되거나 특정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된 것도 많았다. IO 입장에서 ‘쓸모 있게’ 보이기 위해, 수사에 관련이 없는 정보들도 대거 올라갔다. 또 경쟁적인 정보 수집 과정에서 다른 기관의 정보관들과 정보를 주고받는 거래가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정보가 누락되거나, 범죄 정보가 새나가는 사고도 있었다.
청와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예민한 정보를 공유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 박근혜 정권 때는 우병우 라인 검사들이 독식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범정기획 소속 검사들이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파견 당시 우병우 전 민정수석 지시를 받아 ‘삼성 경영권 승계’ 문건 작성에 관여한 이영상 범정1담당관(사법연수원 30기)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또, 우병우 라인으로 지목된 정수봉 전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사법연수원 25기)은 서울고검으로 좌천 인사를 받았다.
때문에 현 검찰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수사’에 도움이 될 정보 수집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범죄 혐의와 상관없이 각 분야의 동향을 수집하는 업무는 폐지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 동향 대신 ‘보강 조사’ 등의 이름으로 2담당관실 이름을 바꿀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찰청 내부 사진
대검찰청 핵심 관계자는 “국가정보원 TF가 넘겨주는 자료처럼 꼭 검찰이 확보한 정보가 아니더라도 해야 할 수사가 많지 않냐, 수사에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만 모아서 가겠다는 게 새로운 범정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검찰은 수집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 검찰의 정보가 권력의 사적 도구로 남용되지 않게 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히 구조만 바꾸는 게 아니라 간판도 바꿀 예정이다. ‘범정’이라는 이름을 떼고, 새 이름으로 새로운 업무를 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번 검찰의 범정 부활 결정을 놓고 곱지 않은 시선들도 적지 않다. 특히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경찰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눈길을 끈다. 현재 경찰은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에 대한 대형 수사를 거듭 진행하고 있는데, 원래 대기업의 각종 비리 사건은 검찰이 독식해왔던 영역이다. 특수수사 영역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강한데 경찰 관계자는 “검찰이 IO를 운영하면, 전통적으로 강했던 수사 영역에서의 범죄 정보를 대거 모으고 성과를 내지 않겠냐”며 “경찰도 이를 위해 IO를 보강하는 등 준비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국정원의 ‘부재’ 속에 경찰과 검찰의 국내 정보 파악 1인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통상 예민한 정보는 위(청와대)로 은밀하게 보고되곤 하는데, 국내 정보 수집에 가장 우위에 있던 ‘국정원’은 사실상 폐업한 상태다. 검찰이 IO를 운영하지 않았던 기간 동안, 경찰이 청와대에 상당한 정보를 보고해 ‘점수’를 땄다는 설까지 돌고 있다.
사정기관의 한 IO는 “국정원이 사라진 국내 정보 파트에서 지방 등 전국 정보에 밝은 경찰과, 국회와 대기업 등 주요 기관 정보에 밝은 엘리트 검찰 간 경쟁이 이뤄질 수 있다”며 “검찰과 경찰 모두 범죄 정보가 우선이지만, 서로 우위에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두 기관 모두 위(청와대)에 필요한 정보들이 모이면 이를 경쟁적으로 위로 보고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