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대법원장 때 의혹 불거졌지만 ‘혐의 없음’ 결론…추가조사 진행하자 이번엔 ‘강제 조사’ 논란
이번 사태는 지난해 2월부터 계속된 의혹의 결과로 봐야 한다. 법원 내부에는 판사들이 가입해 학술활동을 하는 전문분야 연구회들이 있다. 사실상 사문화된 예규에 따르면 연구회는 중복가입이 금지돼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법원 내부 전산망에 갑작스럽게 사문화된 이 예규에 따라 연구회 중복 가입 여부를 파악해 정리하고 정리가 안 된 사람의 경우 나중에 가입한 연구회에서 탈퇴 조치 하겠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2일 김명수 대법원장이 신년사를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의혹이 쏟아져 나오자 판사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제기되고 있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한 중립적인 조사 기구를 꾸리기로 했다. 전국 법관들의 추천을 통해 이인복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아 사법개혁 요구 축소 시도 의혹에 관한 진상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최초 진상조사위원회는 세 가지 항목에 집중하기로 했다. 법원행정처가 전문분야 연구회 중복가입을 제한했는지, 법원행정처 이 판사의 인사발령이 부당했는지,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특정 학회에 대한 활동 견제 및 압력이 있었는지 여부가 주요 대상이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 조사에서 충격적인 진술이 나오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축소하기 위한 시도는 실제로 있었고 이 같은 시도의 주체는 대법원 산하 연구기관인 양형위원회 소속 이 아무개 상임위원으로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발언은 이 판사가 이 상임위원으로부터 ‘기획조정실에 가면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파일이 있다. 좋은 취지에서 한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진술이었다.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일선 판사들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부당한 움직임 수준을 넘어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사찰 파일까지 만든 게 된다. 법을 수호해야 할 사법부가 불법의 중심에 있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보였다. 진상조사위 결과는 판사들의 기대와 달랐다. 발언 내용과 달리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결론 냈다.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의혹을 받은 컴퓨터를 조사하지도 않고 내린 결론이라 뒷말이 무성했다. 한 일선 법원 판사는 “컴퓨터 한 번 들여다보지 않고 혐의자들의 진술만 갖고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결론낸 조사결과를 누가 수긍하겠나. 이렇게 은폐돼선 안된다는 마음이 모여 이례적으로 판사들이 전국 각 법원에서 추가조사를 요구하는 결의를 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법원 내부에서는 진상조사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판사들이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1차, 2차 전국법관회의를 거치면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 요구를 거부한 양승태 대법원장에 항의해 현직 부장판사가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법원 밖으로도 사건은 퍼져나갔다. 같은 달 시민단체의 고발로 양승태 대법원장,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등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발됐다. 법관들 싸움에 검찰이 개입한 셈이다. 대법원장을 검찰이 조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이어져오던 문제는 지난해 9월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김 대법원장이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 조사를 결정하고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추가조사위원장으로 한 추가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문제는 추가조사위원회가 지금 사건의 핵심이 되는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판단되는 PC를 확보하기 위해 나서면서 시작됐다. 당시 PC를 사용하던 법관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유한국당 측도 ‘강제조사를 시작하면 대법원장을 형사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재조사위는 당사자 동의를 받기 위해 수차례 노력했지만 결국 받지 못했다.
당사자들은 ‘사적 정보가 있다’, ‘영장 없이 보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맞서고 있지만 재조사위를 지지하는 판사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활동했던 한 판사는 “개인용 PC도 아닌 업무용 PC를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람에게 제출받았기 때문에 영장이 필요 없다. 또한 사적인 정보를 지우라고 기회를 줬다.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것은 열어보지 말라는 얘기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서초동 한 변호사는 “법원이 행정목적으로 자신이 소유하고 점유한 PC를 조사하는데 영장이 왜 필요한가”라며 “과거 판례에 회사 이익을 빼돌린다는 소문을 확인할 목적으로 회사가 개인용 컴퓨터에서 회사와 관계된 키워드를 검색해 봤다면 이는 정당행위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있다. 이 판례 당시 컴퓨터는 회사 소유도 아닌 개인용 컴퓨터였다”고 설명했다.
어쨌거나 지난해 12월 26일 본격적인 조사를 알렸고 28일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컴퓨터 사용자의 동의 없이 법원행정처 컴퓨터를 조사하기로 한 것이 법에 어긋난다는 취지로 김 대법원장을 고발했다. 이 사건은 지난 2일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에 배당됐다. 이로서 전·현직 대법원장이 모두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시각이 나뉘어지긴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시각이 많다. 어쨌건 PC가 개봉된 만큼 곧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블랙리스트를 넘어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온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업무용 컴퓨터에 무슨 사적인 정보가 있길래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완강히 거부하는 것을 보면 블랙리스트보다 더 큰 뭔가가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귀띔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