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가 핵심 지지층, 반발 거세…예상 밖 폭발력에 ‘발등의 불부터 끄자’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렇게 푸념했다.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청와대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의 UAE 방문 의혹을 천신만고 끝에 해소시켜 놨는데 비트코인 폭탄이 폭발, 곤혹스럽기가 이를 데 없다는 의미였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1월 11일 “거래소를 통한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하는 특별법을 곧 시행하겠다”고 전격 발표했지만 청와대는 불과 한나절 만에 이를 뒤집어엎었다. 장관 정책 발표가 나오고 7시간 만에 청와대가 제동을 걸고 나선 셈이다. 청와대는 “추후 협의를 통해 추진하겠다”고 물러섰다.
사실 박 장관은 가상화폐 거래소 거래 금지에 대한 정책 발표를 하면서 “부처 간 이견이 없다”며 정부 내 조율이 끝났다고 밝혔었다. 청와대도 승인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청와대로서는 20~30대 젊은층 중심의 300여 만 명으로 추정되는 투자자들이 들고 일어나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는 “확정되지 않았다”며 발을 확 빼버렸다.
자유한국당은 가상화폐 정책 번복 등과 관련, ‘오락가락 정책 결정 장애를 가진 사춘기 정권’이라는 별명을 문재인 정부에 붙여 놨다. 역대 정부 모두가 2년차부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던 이른바 ‘집권 2년차 징크스’가 문재인 정부에서도 재현되는 것이 아닌지, 청와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명동에 위치한 빗썸 비트코인 거래소. 임준선 기자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1월 11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다. 가상화폐 투기에 초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쇄하는 데 관계 부처 간 의견이 모였다고 밝힌 것이다. 박 장관은 이날 오전에 열린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 특별 법안을 내는 것에 부처 간 이견이 없다”면서 “법무부 안은 이미 마련돼 있다. 법안은 언제든지 제출할 수 있다”라고 했다.
법무부가 마련한 ‘가상증표(가상화폐) 거래 금지에 관한 특별법’ 초안에는 가상화폐 거래소를 이용한 거래에 대해 금지 의무를 주고,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하거나 중개영업 광고를 했다가 적발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박 장관은 거래소 폐쇄 일정을 구체적으로 못 박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국회 입법을 앞두고 관련 부처와 합동으로 중간에 여러 대책이 마련돼 집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같은 날 국회 4차 산업혁명 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법무부 장관의 말씀은 부처 간 조율된 말씀이고, 서로 협의하면서 할 일을 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가상화폐를 두고 주무부처 수장들인 동시에 문재인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이들이 같은 날 동일한 강도의 ‘광폭 규제’ 입장을 내놓으면서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 방침은 확정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불과 7시간 정도 지나자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전화기에는 ‘다른 말’이 찍혔다. 청와대가 박 장관 발언에 대해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라며 이날 오후 급하게 진화에 나선 것이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암호화폐(가상화폐) 거래소 폐지와 관련한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발언은 법무부가 준비해온 방안 중 하나이지만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법무부도 부랴부랴 입장을 바꿨다. 법무부는 같은 날 오후 ‘가상통화 관련 법무부 입장’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기자들에게 보내 “법무부는 가상통화 거래소 폐쇄를 위한 특별법을 준비해왔으며 추후 관계 부처와 협의를 통해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제 부처에서 고위직을 지내고 퇴직한 한 공무원은 “모든 정부 부처는 사실 청와대를 보고 움직인다. 특히 기재부 법무부 등 이른바 힘센 부처는 장관이 발표를 하는 사안마다 청와대와의 사전 조율을 더 꼼꼼하게 거친다. 청와대 보고 없이 독자적으로 정책 발표를 하는 간 큰 장관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가상화폐 규제도 분명히 사전에 청와대 보고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청와대가 불과 한나절 만에 장관의 말을 뒤집은 것은 투자자들의 반발 등 예상치 못할 만큼 강했던 어떤 후폭풍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연령층 높은 유권자들을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는 상대적으로 젊은층 지지가 두텁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그랬지만 문재인 대통령 역시 젊은이들 지지세가 뜨거운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상화페 규제’는 젊은층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정부 부처와 사전 조율을 했을 청와대가 갑자기 반나절 만에 부처 발표를 뒤집은 이유가 핵심 지지층의 반발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1월 15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20대의 국정 지지율은 81.9%에서 72%로 떨어졌다. 오차범위 이내긴 하지만 가상화폐 논란이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에 힘을 보태는 수치다. 청와대도 핵심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20·30에 대한 고민’을 숨기지는 않는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가상화폐 규제에 예상을 넘는 수준의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핵심층이 20~30대에 몰려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청와대의 걱정처럼 가상화폐 규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규제를 반대하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 명 이상이 참여,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청와대가 왜 급하게 정책 번복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를 보면 지난 16일 오전 8시를 기준으로 ‘가상화폐규제반대, 정부는 국민에게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해본 적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청원에 모두 20만 1000여 명이 참여했다.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나 각 부처 장관 등이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내놔야 하는 기준인 ‘한 달 내 20만 명 참여’ 조건을 갖췄다.
순식간에 20여 만 명이 청원에 참여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집권 세력에 대한 지지층의 반발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금전적 이해관계다. 세금이나, 특정 자산에 대한 정책 규제 등 국민들의 지갑 두께를 좌우할 수 있는 사안이 생기면 지지자들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역대 정권에서 지지층의 반발을 불렀던 정책은 정부여당에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어진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했던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는 종합부동산세 과세가 시행된 이후 조세저항 심리가 확산됐다. 이듬해인 2006년 지방선거에서 집권 열린우리당은 참패했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에는 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공제를 줄이는 방식의 증세를 추진했다. 신문지상을 연이어 장식했던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 수석이 내놨던 정책은 결국 공회전만 하다가 멈춰 섰다. 봉급생활자들의 강한 불만을 불러왔고 정부는 세법개정안을 수정, 커져가는 반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가상화폐를 둘러싼 혼란에 대해 사실상 정부 관계자들을 질책했다. 문 대통령은 1월 16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부처 간 협의와 입장조율에 들어가기 전에 각 부처의 입장이 먼저 공개돼 정부부처 간 엇박자나 혼선으로 비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가상화폐 규제책 발표 과정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이전 정부에서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정치인은 “공무원연금 개혁을 추진했던 박근혜 정부가 집권 2년차인 2014년 12월 ‘군인·사학연금 개혁도 추진하겠다’고 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했다. 사전 조율과 여론수렴 부족 탓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이 미치는 사안, 특히 유권자들의 지갑이나 통장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부처 간, 청와대 참모 간 정책 조율이 정말 중요한데 취임 초기 각오가 다소 느슨해지는 집권 2년차에 들어서면 이런 혼선이 여기저기서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정부는 가상화폐 거래소를 전면 폐쇄하는 방안을 여전히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1월 18일 국회 정무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나와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이 “근본적으로 거래소를 (전면) 폐쇄하느냐, 아니면 불법행위가 존재하는 거래소는 폐쇄하느냐”고 묻자 “협의 중에 있는 안 중에는 두 가지 다 들어 있다”고 답변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