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전 등 굵직한 기전 15개 중단…배고픈 프로들 아마대회까지 출전 ‘심각’
박정환은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국내에선 3년 이상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비공식 세계랭킹에서도 중국 커제를 제치고 1위에 올라있다. 신진서는 누구인가. 2000년생으로 박정환의 뒤를 이은 랭킹 2위로 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으로 이어지는 한국바둑의 계보를 이을 것이 확실시 되는 기사다.
크라운해태배 시상식. (왼쪽부터) 준우승 신진서 8단,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우승 박정환 9단. 국내랭킹 1위와 2위가 신예기전 결승에서 만났다.
그런데 이 중량감 넘치는 대결의 무대가 문제였다. 17년 전 이창호와 이세돌은 우승상금 3억 원의 최고무대 결승전에서 만났지만, 박정환과 신진서는 고작 우승상금 3000만 원의 2017 크라운해태배 결승에서 대결을 펼쳐야 했다.
크라운해태배를 폄하하려 함이 아니다. 올해 신설된 크라운해태배는 모든 기사가 참가할 수 있는 정규기전이 아니라 만 25세(1992년생) 이하 프로기사만 참가할 수 있는 신예기전이다. 그러니까 국내랭킹 1위와 2위가 신예기전에서 만난 셈이다.
주최측은 적은 비용을 들여 고효율을 창출했으니 환호하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작금의 국내 바둑계 현실이다.
현재 한국기원 홈페이지에 기재돼 있는 국내 기전(棋戰)은 15개. 하지만 그중 전체 기사가 참가할 수 있는 기전은 GS칼텍스배 프로기전과 KBS바둑왕전 2개뿐이고 나머지는 신예나 여성, 시니어, 9단전 등 출전에 제약이 따르는 제한기전이다. 행정을 담당하는 쪽에서는 기전은 줄었어도 여자바둑리그나 시니어리그 등이 신설돼 전체 기전 규모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기전’보다 ‘리그’가 좋다고 하는 프로기사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줄어든 기전이 회생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한국기원 홈페이지 기전정보 페이지를 보면 현행기전 아래 중단된 기전이라는 난이 있는데 여기에는 역시 15개의 중단된 기전이 명시돼 있다. 전통의 국수전, 명인전, 십단전, 천원전, 렛츠런파크배, olleh배 등 굵직굵직한 기전들이 현재 중단된(혹은 없어진)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40여 명을 헤아리는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들의 대부분은 개점휴업 상태다. 랭킹이 높은 기사들은 그나마 대국료가 많은 한국바둑리그나 세계대회에 출전할 수 있지만 많은 수의 기사들은 출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연초 입단한 새내기 초단의 한 해 공식 대국수가 10여 판에 불과하고,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 중 4분의 3은 연 평균 대국 수입이 100만 원도 안 된다”는 한 프로기사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에 추월당한 일본은 우리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1980년대까지 세계바둑을 선도하던 일본은 90년대 들어 한국과 중국에 실력으로 밀리면서 정상에서 물러났다. 일본 기사들은 세계대회에서 힘을 쓰지 못했고, 결국 최고의 국제기전이었던 후지쓰배와 도요타덴소배도 중단됐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본은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국내기전은 철저히 지켰다.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는 기성전, 명인전, 본인방전을 비롯해 십단전, 천원전 왕좌전 등 다양한 형태의 기전이 그대로 남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일본 국내 기전은 정확히 20개다.
기전의 난맥상은 운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재)한국기원은 바둑리그 참가팀 모집을 위해 멀쩡히 운영되던 물가정보배를 폐지하고 이를 한국바둑리그 물가정보 팀으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바둑 관계자는 “기업이나 신문사가 후원하는 기전이 경제 상황에 따라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빨간불이 오래 전에 켜진 상태인데도 한국기원 집행부나 사무총장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그는 “홍석현 총재와 중앙일보 사람들이 한국기원 요직을 맡으면서 바둑계 상황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게 공통된 여론이다. 도대체 취임 후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설마 CJ로부터 바둑TV를 넘겨받은 것을 성과라고 하진 않을 것이라 믿는다. 대한바둑협회를 잃었고 GS칼텍스배도 전임 허동수 이사장의 배려로 겨우 명맥을 잇는 것 아닌가. KBS바둑왕전도 매년 KBS 측에서 새로운 스폰서를 구해오지 못할 경우 중단하겠다고 하는 상태다.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도 그쪽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언제 중단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얼마 전 홍석현 총재 쪽에서 JTBC배 챌린지매치를 만들었는데 총 규모가 2억 3000만 원이다. 9단들만 출전할 수 있는 맥심커피배 2억 원과 비슷한 규모인데 이마저도 한 번에 치르는 게 아니라 4회로 나눠 치러 우승상금이 1500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올해 한 지방 아마바둑대회가 주말 2000만 원의 우승상금으로 추진된다고 하는데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프로의 아마대회 전격 출전은 동료 프로기사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굶어죽어도 프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데 세계대회 우승자와 바둑리거들이 아마추어와 호선으로 둘 것을 자청했으니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기전을 열어주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한국기원의 실정과 맞닿아있다. 프로가 아마대회 나가는 것은 현대바둑 60년 사에 무척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한국기원은 아마바둑 주관단체인 대한바둑협회와 단 한 차례의 협의도 없이 프로기사들의 출전을 제한없이 허용했고, 대회 출전에 아무런 기준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냥 출전하고 싶으면 하라는 식이었다. “그럴거면 뭐하러 입단대회를 열며, 프로는 아마대회에 자유롭게 출전하면서 아마는 왜 프로대회 출전에 제한을 두느냐”고 해도 할 말 없는 처사였다.
‘구단제’가 아닌 참가비 약간만 내면 참가할 수 있는 ‘N분의 1, 리그제’는 언 발에 오줌누기식의 미봉책일 뿐이라는 게 다수 관계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바둑 백년대계를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한국기원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