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아니었다”에서 “남녀간 애정”으로…‘애정 관계’ 주장할 증거는 전무
9일 오후 서울서부지검에 안희정 전충남도지사가 자진출두하고 있다. 안지사는 여비서 성추행(위계에 의한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상태다. 정치권에서는 최초의 미투(me too)사례이다. 이종현 기자
지난 14일 서부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 피해자 A 씨는 첫 번째 피해자인 충남도청 전 정무비서 김지은 씨(33)와 마찬가지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법무법인 혜명의 오선희 변호사와 법무법인 단심의 신윤경 변호사가 A 씨의 변호를 맡았다.
A 씨는 안 전 지사의 싱크탱크인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더연)’ 소속 연구원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안 전 지사로부터 3차례의 성폭행과 4차례의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성추행을 당한 시점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7월, 성폭행을 당한 시점은 2016년 8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다.
‘더연’은 안 전 지사가 2008년 창립해 충남도지사로 당선된 2010년까지 소장으로 역임했다. 이 때문에 A 씨가 피해 사실을 주장하는 시기와 안 전 지사가 공개적으로 더연 내외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가 맞물리지 않아 업무상 관계로 인한 위력이 적용될 수 없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안 전 지사는 1대 소장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 상임고문으로 여전히 더연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과시했다. 안 전 지사가 초대 소장이었던 만큼 그가 소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더연’ 소속의 임직원들은 ‘친안희정계’로 분류됐다. 더연을 거친 인사들 가운데 이사장·소장 출신 인맥들은 국회에 자리매김을 하면서 안 전 지사의 세력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더연 소속 임원들은 안 전 지사가 충남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도청 내 안 전 지사의 최측근 자리를 꿰찼다. 2010년에는 조승래 더연 사무국장이 비서실장의 자리에 올랐고, 2014년에도 이후삼 더연 사무국장이 정무비서관으로 임명됐다. 도지사 취임 후 연례행사처럼 보여주던 안 전 지사의 ‘산행’에도 더연의 이름이 빠지는 일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안 전 지사가 소장이었을 때와 A 씨가 직원으로 재직한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업무상 위력’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앞서 A 씨의 변호인단은 “연구소와 안 전 지사와의 관계를 입증할 자료를 고소장과 함께 제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안 전 지사가 연구소에 실질적으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었고, 이를 토대로 A 씨에게 위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소명할 자료로 파악되고 있다.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로부터 성폭력 등 피해를 입었다고 폭로한 두번째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 오선희(왼쪽), 신윤경 변호사가 고소장을 제출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주목할 점은 A 씨가 강제추행의 혐의도 함께 묻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강제추행은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한 상황에서 발생한 추행에 대해 죄를 묻고 있다. 단순히 업무상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력으로 성폭력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실제 A 씨에게는 안 전 지사가 폭행 또는 협박으로 해석될 소지가 높은 위력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성범죄 전문 형사변호사는 “강제추행에서 인정되는 폭행은 신체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행위뿐 아니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까지 포괄한다”라며 “예컨대 피해자를 성폭행 또는 추행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억압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해도 ‘하지 말라’는 피해자의 말에 반하는 유형적인 행위라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이 역시 강제추행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피해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안 전 지사 측은 성관계에 대해서는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강압적인 행위가 아니라 남녀 간 애정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초 안 전 지사는 앞선 첫 번째 피해자 김 전 비서에 대해 “합의된 관계였다는 것은 비서실이 잘못 말한 것”이라고 부정하며 “모두 다 제 잘못”이라고 인정했었다. 그런데 돌연 검찰 수사가 이어지고, 추가 피해자가 등장하면서 선임한 변호인단을 통해 ‘성폭력 사건’을 ‘남녀 간 애정문제’로 비화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앞선 변호사는 “(안 전 지사가) ‘성폭력’이라는 치명적인 법적 책임 문제를 ‘애정 관계’라는 이름의 도의적인 책임으로 판의 흐름을 바꾸려는 것 같다”라고 짚었다. 그는 김 전 비서의 피해 기간이 지난해 6월부터 올 2월까지고, 두 번째 피해자 A 씨의 피해 기간이 2015년부터 지난해 1월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에도 주목했다. 이 사실이 안 전 지사 측의 “좋은 감정을 갖고 만나던 남녀 관계”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변호사는 “현재로서 안 전 지사 측은 성폭력범이라는 중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합의한 관계라는 점을 내세우고 대신 불륜이라는 도의적 책임을 지려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그의 주장대로 합의한 남녀 관계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증거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는데 현재로서는 안 전 지사 측이 제출할 수 있는 증거는 전무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 피해자인 김 전 비서는 안 전 지사와의 관계를 모바일 메신저인 텔레그램으로 입증했는데, 이 텔레그램은 비밀 대화방을 이용할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메시지가 모두 삭제된다. 안 전 지사가 피해자들과 나눈 메시지를 별도로 보관하지 않았다면 그의 ‘남녀 관계’를 입증할 증거는 전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사건을 맡고있는 서울서부지검은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 안 전 지사를 이르면 주말, 늦어도 19일 이후 소환해 ‘업무상 위력’의 실체 파악을 위해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미 검찰은 안 전 지사의 경기도 광주시 자택과 충남 홍성의 충남지사 관사를 압수수색해 CCTV 영상 등 혐의 사실을 입증할 자료들을 확보한 상태다.
한편, 전국성폭력상담협의회는 김 전 비서와 두 번째 피해자 A 씨 외에 추가 성폭력 피해자가 더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2차 피해를 우려해 안 전 지사에 대한 법적 대응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피해 사실 역시 신원 보호를 위해 본인이 아닌 제3자를 통해 협의회 측에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 사건 역시 고소 내용은 모두 밝히되 자신의 신원은 드러내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고소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