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역사-흥남철수부터 청계천까지…정권 따라 변하는 출제 방향에 수험생들 혼란
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2018년 3월 24일 서울시 9급 공무원(기술직) 필기시험이 치러졌다. 국사과목 17번 객관식 문항은 “북한 정권 수립 과정을 시간순으로 바르게 나열하라”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조선인민군 창설, 토지개혁 실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립 등이 보기로 제시됐다. 2009년 4월 9급 공무원 필기시험에서 북한사 문제가 나온 이후 8년 만이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정권 성향에 따라 문제가 바뀌는 느낌이다. 아무리 남북 화해 분위기가 일고 있어도 기술직 공무원이 북한사까지 알아야 하나”라는 불만이 나왔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북한정권 수립 과정 내용은 고교 교과서에도 기술된 내용이다. 시대와 난이도에 따라 고르게 출제됐던 부분이다. 특별한 의도는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날 논란이 된 문제는 또 있었다. 서울시 7급 공무원(행정직) 9번 객관식 문항은 “1960~70년대 전개된 민주화 운동을 시간 순으로 옳게 배열하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ㄷ 보기엔 “교련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위수령이 발동됐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1971년 박정희 정권 때 최초로 발동된 위수령과 관련된 문제다. 수험생들은 ‘위수령’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
2018년 3월 24일 서울시 7급 공무원(행정직) 9번 객관식 문항. 서울시 홈페이지 캡처
시험에 응시했던 공무원 준비생 A 씨는 “공무원 국사에 너무 정권친화적인 문제는 지양했으면 한다. 위수령이란 단어는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며 “정권에 따라서 문제출제가 요동을 친다. 수험생이 문제를 제기하면 손해라서 조용히 있지만 공무원 시험의 특정 문제가 한쪽으로 편향됐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방송사들 사이에선 ‘위수령’을 두고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JTBC’는 3월 2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촉구 촛불집회 당시 국방부가 위수령을 검토했다는 내용의 문서를 공개했다. ‘SBS’는 군 스스로 위수령을 검토한 게 아니라 이철희 민주당 의원의 요청을 받고 국방부가 살펴본 것이라고 반박했다.
위수령 발동 지문은 역대 시험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수험생들이 ‘교련반대시위’-‘위수령’을 보고 ‘촛불시위’-‘위수령’이란 내용을 연상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위수령을 출제한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도는 없다”며 “정권에 편향된 문제는 아니다. 출제위원이 매년 바뀌고 시험 때마다 별도로 위촉한다. 정권과 상관 없이 전문성을 기준으로 출제위원들을 선정하고 있다”고 답했다.
2017년 9월 23일 경찰간부 제67기 경찰간부후보생 선발필기시험 한국사 과목. 기출문제 캡처
서울시 주관 시험뿐만이 아니다. 2017년 9월 23일 경찰간부 제67기 경찰간부후보생 선발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대한 시험이 나왔다. 한국사 과목 객관식 35번 문항은 “1945년부터 8월 15일부터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북한에 관한 다음 설명 중 가장 옳지 않은 것을 고르라”고 물었다.
문항 보기에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조만식을 선출하였다”, “북한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방식의 토지개혁을 시행하였다”, “북한은 인민군을 창설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등이 제시됐다. 앞서 서울시 9급 공무원(기술직) 필기시험 문제와 비슷한 내용이다.
당시 경찰간부 수험생 사이에서도 “북한사 문제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등장한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해 경찰 교육원 관계자는 “정권에 따라 출제 성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경찰 업무 중에 보안 업무가 있다. 보안을 위해서 북한과 관련된 내용을 알아야 한다”며 “업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출제했다”고 밝혔다.
2017년 8월 26일 시행된 7급공무원(국가직) 필기시험 20번 문항. 기출문제 캡처
문제는 인사혁신처가 주관하고 있는 7·9급 공무원 시험에서도 묘한 풍문들이 들린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사 과목 7급 공무원(국가직) 20번 문제는 공무원 준비생들 사이에서 “대통령 근황을 묻는 용비어천가 문제”로 불리고 있다. 실제로 2017년 8월 26일 시행된 7급 공무원(국가직) 필기시험 20번 문항은 “(가)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을 고르라”고 물으면서 1번 보기로 “대규모 해상 작전인 흥남철수가 이루어졌다”라는 지문을 제시했다.
수험생들은 ‘흥남철수’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문 대통령의 방미 직후 7급 공무원 필기시험에 ‘흥남철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29일 방미 첫 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의 3대 전투로 흥남철수 작전에 기여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장진호 용사들의 놀라운 투혼 덕분에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며 “그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난민 중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다”고 밝혔다.
2016년 8월 27일 시행한 7급 공무원(국가직) 필기시험 20번 문항. 기출문제 캡처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7급 공무원(국가직) 20번 문제가 주목을 받았다. 2016년 8월 27일 시행한 7급 공무원(국가직) 필기시험 20번 문항은 “밑줄 친 ‘이것’이 수행한 내용으로 옳은 것을 고르라”고 물으면서 보기로 “소련의 방해로 남한지역에서만 총선거” 등을 제시했다. 20번 문항의 ‘이것’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다. 공교롭게도 그해 5월 18일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방한해 ‘대권행보’를 가시화했고, 자유한국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지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출제위원들이 편향된 문제로 친문 친박을 가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들린다. 공무원 준비생 B 씨는 “반기문 대망론, 흥남철수 등 확실히 정권 차원에서 노리고 출제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의 A 씨는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과 출제교수의 편향성을 수험자가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대통령 의중에 따라 뜬금없는 문제가 나오면 수험생들이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도 영조의 청계천 준설이 시험 문제로 튀어나와 수험생들을 당황시킨 적이 있다”고 밝혔다.
2009년 9급 공무원(국가직) 한국사 과목 9번 문항
실제로 2009년 4월 11일 시행된 9급 공무원(국가직) 한국사 과목 9번 문항은 “다음에서 설명하는 제도가 시행됐던 왕대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고르라”며 지문으로 “양인들의 군역에 대한 절목 등을 검토하고 유생의 의견을 들었다. 핵심내용은 1년에 백성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것이다”는 내용이 나왔다.
군역법을 시행한 영조에 관련된 지문이었다. 정답은 “청계천을 준설하여 도시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는 4번 보기였다. 영조는 홍수 예방과 상업도시 번영을 위해 청계천을 준설했다. 2008년 시행된 국가직 7급 공무원 필기시험에서도 영조의 청계천 준설과 관련된 내용이 차례로 등장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복원한 청계천에 대한 치적을 홍보하기 위해 문제를 출제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인사혁신처 출제과 관계자는 “특정 정치적 세력을 염두에 두고 출제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민간위원이 시험 출제를 전담하기 때문에 정권의 입김과 정치적 의도가 들어갈 수 없다”고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