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미수 후 다시 소속사 건물서 투신…소속사 유서 공개 안해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
혜성처럼 나타난 귀여운 소녀는 ‘유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권위 있는 일본 레코드 어워즈에서 신인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후 승승장구였으며 탄탄대로였다. 18세가 되던 1985년엔 ‘금지된 마리코’라는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고, 다음해엔 ‘입술 네트워크’로 드디어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다. 당시 톱 아이돌이었던 마츠다 세이코가 작사를 해주었던 이 노래의 성공은 그녀가 마츠다의 뒤를 잇는 대형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좋은 징조였다. 1986년 2월, 아직 19세가 되지 않았던 오카다 유키코는 당시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장래성 밝은 가수이자 배우였다.
소속사 선 뮤직의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자택에서 지내던 유키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그마한 맨션으로 독립한다. 이사한 지 4일째 되던 날인 1986년 4월 8일 오전 9시, 가스 냄새가 난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은 관리인은 유키코의 집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는 걸 눈치 챈 후 신고했고, 10시 즈음에 소방대원들이 도착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스 냄새로 가득 찬 실내 한 구석에 유키코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왼손 쪽을 칼로 그은 것. 병원에 옮겨진 유키코는 응급 처치 후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자살 미수 소식은 일본 전역에 퍼져 있었다.
총괄 매니저인 미조구치 노부로는 휴가 중이었다. 선 뮤직 간부인 후쿠다와 매니저 야마자키가 먼저 병원에 도착했고, 일단 유키코를 선 뮤직 사무실로 데려왔다. 이때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키코는 사라졌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했다. 12시 15분. 1차 자살 시도가 발견된 지 세 시간 만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녀의 자살 미수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소속사 건물 밑에 진을 치고 있던 취재진들은 유키코의 죽음을 갑작스레 목격하게 되었고, 그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으며 마치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듯 선정적인 보도에 열을 올렸다.
원인을 두고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선 뮤직의 아이자와 사장은 아파트에서 발견된 유서를 독점한 채, 당시 출연하던 TV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에서 상대역이었던 미네기시 토오루가 원인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40대의 유부남이었던 미네기시와의 관계가 잘되지 않자 비관한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 이에 미네기시는 갑작스런 기자회견까지 열며 극구 부인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정작 다른 사람이 있는데 왜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귀찮은 일이다.”
이후 무려 17세 연상인 칸다 마사키와 연인이었는데 마사키가 마츠다 세이코와 결혼 발표를 하면서 좌절했다는 믿을 수 없는 설도 있었고, 역시 17세 연상인 타치 히로시와의 관계도 대두되었다. 유키코가 세상을 떠나기 8일 전 아이돌 스타였던 엔도 야스코가 자살했는데, 야스코 역시 연애 문제로 고민하던 중이었고 이에 동질감을 느낀 유키코도 죽음을 선택했다는 가설도 있었다. 스타를 열망했으나 정작 실제로 접한 연예계의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는 일반론이나, 조울증 증세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하지만 소속사에선 그녀의 유서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유키코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이른바 ‘유코 신드롬’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 효과 속에서 모방 자살을 했다. 첫 희생자는 4월 15일에 나왔다. 고베의 13층 아파트 옥상에서 박미지, 일본 이름은 마츠바라 미키인 재일 교포가 “오카다 유키코처럼 되고 싶다”는 유서와 함께 투신했다. 1년 전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국적 문제로 따돌림을 당하던 그녀는 학교를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외롭게 살아가다가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마지마 마사히로라는 21세 청년도 주머니에 오카다 유키코의 사진을 품은 채, 유키코가 뛰어내린 바로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병원을 운영하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의대에 지원했지만 떨어진 후 집을 떠나 외롭게 살아가던 상황이었다.
이런 일이 한동안 계속됐고, 특히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끔찍한 죽음이 많았다. 급기야 1986년 일본의 청소년 자살률은 50퍼센트가 증가했는데, 이것은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일단 언론의 선정적 보도가 쏟아지면서 죽음을 은연중에 조장했다. 더 중요한 건,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두운 반영이라는 분석이었다. 버블 경제 속에서 호황 속에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낀 젊은이들이 유키코의 죽음에서 뭔가 강한 내적 자극을 받았고,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 이처럼 오카다 유키코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과 연결된 비극이었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