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광우병 파동·2008 촛불시위 10주년 2-2008년의 촛불 그리고 2016년의 촛불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집회. 사진=사진공동취재단
10년 전인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의 한미 FTA 재협상 과정에서 광우병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30개월 미만 소가 비정형 광우병에 그나마 역학적으로 안전한 편인데, 이명박 정부가 한미 FTA를 개정하면서 전 연령의 소 및 위험부위를 집중 수입하려 한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국민들은 불안감에 당시 정부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국민들을 이해시키고 궁금증을 해소시키려는 시도보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결국 불만이 가중된 시민들은 시위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자발적 참여자들의 소규모 모임으로 시작했다. ‘촛불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주로 연설과 즉석 토론, 연예인들의 즉석 공연 등이 진행됐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48시간 비상국민행동‘에 돌입한 가운데 21일 새벽 집회에 참가한 일부 시민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밧줄로 경찰버스를 끌어내려하고 있다. 2008.6.21 연합뉴스
경찰도 가두 행진을 막기 위해 전·의경 병력과 경찰버스로 차벽을 만들뿐 물리적 진압은 없었다. 다만 집회현장 전체를 차벽으로 둘러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하는 등 촛불집회 진행을 방해해 확산되는 걸 막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시민과 경찰의 갈등이 시작된 점은 야간옥외집회가 불법이냐 아니냐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야간옥외집회를 금지하고 있었다(후에 소송을 통해 위헌으로 결정). 경찰은 해산 경고 방송을 오후 8시부터 틀기 시작했다. 경찰의 진압은 합법이었고, 시위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시민들이 집회를 진행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여전히 실효성 있는 공청회 등 성의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의 촛불문화재 원천봉쇄 압력이 강해졌다. 이에 맞서 집회 참가자들도 경찰의 라인을 무시하고 가두행진을 시도하는 등 충돌은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5월 24일 열린 제17차 집회에서는 경찰의 해산 경고에도 남아있던 250여 명 시위대가 다음날 새벽 4시쯤 해산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해 37명이 연행됐다. 5월 31일에도 집회자들과 경찰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광화문 인근에서 여대생이 경찰의 군홧발에 머리를 폭행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시위대 역시 과격해져 전경을 집단 구타하거나 염산병을 던지고, 새총으로 쇠구슬을 쏘고, 경찰버스를 부수는 등 폭력을 자행했다.
2008년 6월 10일 광우병 촛불집회에 대비해 경찰이 서울 세종로 4거리를 컨테이너로 막은 일명 ‘명박산성’ 사진=이종현 기자
하지만 명박산성은 오히려 시민들을 자극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쏟아져 나오게 했다. 당시 서울 시위는 경찰 추산 8만 명, 주최 측 추산 70만 명을 기록했다.
이후 집회 참가자와 경찰 사이의 폭력이 격해지고,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시민들의 참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위 이슈가 광우병을 넘어 유언비어와 정치색, 반정부성을 띄면서 일반 시민들이 거부감을 느낀 것도 참여수 감소에 일조했다.
7월 초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종교계에서 잇따라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행진을 주도해 다시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지만 집회는 전체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결국 8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촛불시위는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고. 2016년 시민들은 광우병 집회가 열렸던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들고 다시 모였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지켜보고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집회 초기 일각에서는 과거 광우병 집회처럼 또다시 폭력 유혈사태가 벌이지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총 23회에 걸친 공식 집회에 누적인원 1700만 명(주최 측 기준)이 참여했지만, 시위대와 경찰사이에 충돌은 없었다.
이종현 기자=광화문 촛불시위에 주최측 추산 100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세종대로를 가득메운 시민들이 촛불과 박근혜 퇴진, 하야, 태극기등 각종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6.11.12.
8년 만에 어떻게 이런 평화적인 집회가 가능하게 됐을까. 2008년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2016년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을 모두 이끌었던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집회 준비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박 대표는 “2008년과 2016년 촛불 집회를 하면서 준비과정이나 행동방침은 같았다. 우리는 평화로운 집회를 갖는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경찰의 대응방식 때문에 차이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광우병 집회 당시는 경찰이 위법하게 ‘명박산성’을 쌓고, 가두행진을 무리하게 금지시켰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를 탄압해 양상이 다소 격화된 것”이라며 “반면 2016년 촛불항쟁 때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무리해서 세우지도 않고, 경찰은 금지했지만 결과적으로 법원이 허가하면서 집회행진도 합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니까 평화집회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비슷한 의견을 제기했다. 박 의원은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에는 평화로운 집회라고 하더라도 조기에 해산하려 노력을 많이 했다. 당시는 야간 집회가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서는 다 불법 집회였던 것”이라며 “해산하려 투입된 경찰 물리력과 집회 참여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이에 박 의원은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야간옥외집회 금지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2016년 촛불집회가 경찰과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 의원은 “2016년 촛불집회에서는 경찰이 해산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경찰과 집회 참여자 사이에 충돌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 역시 “경찰은 충돌없이 집회를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면서 “당시에는 법에 야간옥외집회가 위법이었기 때문에 조기 해산을 시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여전히 일각에서는 2008년 촛불집회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폄하하거나,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자가 없기에 단순한 선동에 의한 집회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박주민 의원은 지난해 8월 SNS를 통해 “당시 촛불집회로 인해 이명박 정부는 등 떠밀리듯 미국과 다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30개월 미만 연령의 쇠고기만을 수입하는 것으로 수입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게 됐다. 만약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우리 식탁에는 30개월 이상 연령의 미국산 쇠고기가 제한없이 올라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은 30개월 미만 연령의 쇠고기만 수입하고, 광우병 위험이 감지되면 수입을 전면 금지할 수 있다. 특히 쇠고기의 이력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중국이 내건 이와 같은 조건을 보면 한국이 얼마나 낮은 조건으로 미국의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그 조차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박스]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던 MB, 지금은 수감자 처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동부구치소로 압송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2008년 6월 18일 특별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 머리를 숙이며 한 발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의 말과 달리 MB가 촛불을 보고 내린 선택은 소통 강화가 아니라 ‘민주주의 퇴행’과 ‘국론 분열’ ‘공안정국’이었다. 특히 MB가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에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며 화를 냈다는 일화는 그가 광우병 촛불집회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군 등 국가기관을 총동원해 민간인 사찰, 문화계 블랙리스트, 댓글 여론조작 등을 펼치며 촛불집회 단체 등 반대세력에 보복을 가한 사실이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결국, MB는 이러한 업보와 각종 범죄 혐의로 지난 3월 23일 퇴임 5년만에 구속수감되는 굴욕을 당했다. [웅] |
[언더커버] 광우병 파동·2008 촛불시위 10주년 3(끝)-미국산 쇠고기 수입 현황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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