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 명분 내걸고 특정인 차기 회장으로 밀어주기 의혹
황창규 KT 회장이 4월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재계와 정치권의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KT와 포스코 수장 교체 여부였다. 두 곳 모두 사기업이긴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회장도 물러나는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정권이 보내는 시그널을 읽지 못했다가 수사 대상에 올라 사법처리를 받은 회장들도 있었다. 친문 진영에서도 박근혜 정권에서 임명된 권오준·황창규 회장을 바꿔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게 감지됐다.
그러나 두 회장은 “임기를 마치겠다”며 버텼다. 권 회장의 한 측근 인사는 “나름대로 다 상황을 분석해서 내린 결단 아니겠느냐. 권 회장이 일부 정권 실세들과 (거취에 대한) 교감을 나눴던 것으로 안다”면서 “문재인 정권에선 과거처럼 무리하게 회장직을 교체하려 하진 않을 것이란 기대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KT의 한 임원도 “황 회장이 임기를 보장받았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실제 여권에선 포스코와 KT 회장직 교체설이 나돌자 이에 대한 부정적 반응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경제 참모가 문 대통령에게 권오준·황창규 회장에 대한 압박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얘기도 뒤를 이었다. 한 친문 의원은 “솔직히 권오준·황창규 회장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권한도 없는 정부가 사기업 회장직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건 문재인 정부 스탠스와는 맞지 않는다. 나중에 정치적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봤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보다는 강경론이 힘을 얻었다. “버티면 끌어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일요신문’ 1337호 친문 실세들, 황창규 KT 회장 정조준 기사 참고). 사기업 인사 개입이라기보다는 적폐청산 차원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수사기관이 두 회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내부에서부터 비토 움직임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회사를 더 이상 끌고 나가기 힘들다는 판단도 작용을 했다고 한다. 두 회장에 대한 여러 건의 비리 의혹 중 일부는 회사 내부로부터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권 회장은 ‘백기’를 들었다. 권 회장은 4월 18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경찰 소환조사를 받은 황 회장 역시 임기를 마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정치권과 재계에선 권 회장과 황 회장의 차이는 ‘맷집’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둘 다 모종의 압박을 받았지만 권 회장은 직을 던졌고, 황 회장은 그보단 오래 버티고 있다는 얘기다. 앞서의 KT 임원은 “권오준 사퇴에 대한 여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황 회장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이를 두고 재계, 그리고 야권에선 과거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기가 남아 있는 회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는 듯한 움직임들이 현 정권에서도 포착됐기 때문이다. 권 회장의 경우 포스코가 추진한 자원외교와 관련해 상당한 부담감을 호소했다고 한다.
권 회장과 친분이 있는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권 회장은) 물러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청와대 쪽 인사로부터 자원외교 등과 관련해 수사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심적으로 힘들어했다. 자신이 마치 과거 정권의 부역자처럼 받아들여지는 부분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황 회장 역시 권 회장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역대 정권이 포스코와 KT 인사에 개입한 진짜 이유는 회장직에 친여 성향 인물을 발탁하기 위해서였다. MB 정권 시절 친이계 인사들 사이에선 “포스코를 먹으면 3대가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었다. 친문 진영에선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일축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어 보인다. 몇몇 친문 인사들이 특정인과 손을 잡고 차기 회장직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차기 회장 선임 절차에 들어간 포스코는 여권의 실세 정치인이 한 전직 임원을 일찌감치 낙점하고 물밑에서 분위기 조성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KT는 진작부터 한 친문 의원 이름이 거론됐었다. 그가 특정인을 황 회장 후임으로 밀고 있다는 게 골자였다.
재계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KT의 한 중간급 간부는 “황 회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권이 사기업 인사에 개입하는 과거의 악습이 되풀이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거야말로 적폐 아니냐”고 반문했다. 포스코의 한 전직 고위 임원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권 회장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회장이라는 자리가 임기를 꼭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체 과정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뒷말이 나와야 하는 것이냐. 아무리 공정하게 새로운 회장을 임명하더라도 개운하지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